유다 - 배신의 입맞춤
토스카 리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사람에 대한 이보다 더 큰 저주가 있을까? 유다 이야기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그런데 성경은 배신의 동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암시는 있지만 유다를 통해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가 '가룟' 유다라는 것 밖에. ‘가룟도 그 뜻이 분분하다. 거짓말쟁이라는 뜻에서부터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 염색한 사람 등의 뜻이 있다. 일반적인 의미는 '그리욧' 출신의 남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욧의 위치 또한 불분명하다. 이래저래 우리는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유다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배신한 중죄인이다. 그는 기소되었고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형은 집행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바로 변론이다. 모든 법정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변론을 잘 하지 못해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변호사도 선임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소명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그에게서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그의 잘못만 알고 있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유다에 대한 여백이 많은 셈이다.

 

<유다 : 배신의 입맞춤>(홍성사, 2014)은 토스카 리가 이 여백을 파고들어 채운 소설이다. 토스카 리는 <데몬 : 악마의 회고록>(홍성사, 2011)<하와 : 상실의 로맨스>(홍성사, 2012)라는 소설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데몬 : 악마의 회고록>은 한 번의 타락으로 저주받은 악마가 자신들과 달리 용서의 기회를 얻은 인간을 보면서 느끼는 질투와 분노를 모티브로 했고 <하와 : 상실의 로맨스>는 아담의 죽음 이후 하와가 회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특히 그녀의 처녀작인 <데몬 : 악마의 회고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네덜란드어, 폴란드어, 인도네시아어로도 번역되기도 했다.

 

토스가 리가 유다에 대한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운 내용 중에 아마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일 것이다. 소설 <유다>의 유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다와는 사뭇 다르다. 소설 속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판 파렴치한 악당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사장의 손에서 보호하려고 한 사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유다의 절박함을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생생하게 유다의 생각을 우리에게 쏟아 놓는다. 마치 유다의 변호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정황을 읽을 수 있고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허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과거에 그가 살아온 배경을 알지 못하면 지금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게 이유가 없을 수 없다. 이것을 알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유다에게 듣는 것이다. 그래서 토스카 리는 유다가 되기로 결정했다. 사실 소설 <유다>의 유다는 토스카 리다. 혼란스러웠던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산 유다가 되어 보니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준 수많은 이유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유다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다가 되어 유다를 보니 유다를 정죄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유다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유다가 배신의 키스를 했는지 아니면 사랑의 키스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유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훨씬 더 돋보인다. 일방적으로 정죄하기보다 그 사람의 입장에 한번 서 보는 것. 이것이 소통과 섬김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속으로 들어갈 때 그의 말이 다르게 들리고 행동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모든 작가가 그러하겠지만 토스카 리 역시 이 작품을 위해 1세기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제법 많은 공부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없이 오고 간 것은 물론이고 학위 논문 세편을 작성할 만큼의 분량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올 메시야를 갈망했던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유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다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처럼 유다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라면 성경의 기록은 잘못되었다. 잘못된 성경 기록은 유다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했고 사람들은 성경이 만들어 낸 이 선입견 이상 나가지 않는다. 이미 유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토스카 리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선입견을 깨고 고정관념 너머에 있는 사람의 실체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성경이 틀렸다는 말도 소설처럼 유다를 복원시키라는 말도 아니다.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에 도전해 보라는 것이다.

 

사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겪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은 해결될 수 있다. 거기에다 그 사람이 자란 환경을 이해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도,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더욱 강화될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그와 소통할 수 있다.

 

손케 보르트만 감독이 2003년에 만든 <베른의 기적>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헝가리를 3:2로 극적으로 역전시켜 우승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 주인공인 마테스는 소련에 11년간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이제 막 돌아온 아버지가 있다. 마테스의 아버지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아이들을 권위적으로 대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을 때가 더 행복했었다고 할 만큼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 역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갈등은 깊어 갔고 아버지는 신부에게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신부는 마테스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들려주라고 아주 적절한 조언을 한다. 어느 날 마테스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 시간에 11년 간 포로로 억류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자녀들에게 하나씩 들려준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는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자녀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서 마테스의 아버지 역시 달라졌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다. 이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뛰어넘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알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다. 이게 교회며 공동체다. 어쩌면 오늘 교회는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판단과 정죄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백성을 이끌었던 메시야 예수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 각별하다. 유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가 말한 대로 이 책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이 바로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이런 정황의 빛 아래서만 정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다에 비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복음서의 내용과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이 소설이 유다는 물론이고 1세기를 살았던 역사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학자들 간에 차이는 있지만 대략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적어도 30~40년이 지난 다음에 기록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그녀가 이왕에 유다의 편에 서 보기로 결정한 이상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적도 그 의미가 바르게 전달되는 한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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