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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
이희철 지음 / 리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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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유럽인들이 중국과 향신료와 비단 무역을 하기 위해 항로를 찾다가 우연히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내용은 최근까지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유럽인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바닷길 밖에 없기 때문에 항로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희철 교수의 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을 읽으며 그 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존재조차 모르던 우리 세계를 잇고 있는 중간 세계의 존재였다.

 

지구본을 놓고 보면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해 가장 가까운 길은 험한 바닷길이 아니라 동쪽의 육로이다. 그래서 기원전 2세기부터 유럽과 중국은 실크로드를 이용해서 비단을 비롯한 향신료 무역을 했다. 그런데 왜 오랜 동안 무역을 하던 통로를 놔두고 낯설고 험한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그것에 대한 의문조차 갖고 있지 않는 것일까?

 

그 해답에는 15세기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있다. 지금은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동맹을 맺고 싸웠다가 패전국이 되면서 유럽 연합군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위세가 떨어졌지만 15세기 오스만튀르크제국은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스, 아나톨리아, 스페인,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광대한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유럽 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통행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유럽은 오랫동안 큰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던 동쪽 방향의 실크로드를 포기하고 바닷길을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자존심이 상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유럽의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에는 언급을 회피하고 대항해 시대로 포장하여 이야기되고 있다.

 

서양인들은 뿌리 깊은 우월적 시각에서 세계를 기술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양인들의 그런 우월적 태도를 감안하며 동서양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 자체가 서양인들이 동양을 하위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구축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는 서양과 동양으로 양분되지 않으며 중간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또 그 세계가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알코올, 알칼리, 케미스트리, 아스토로노미, 알고리즘과 같은 말들은 모두 중간 세계인 아랍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슬람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동서양의 의학, 천문학, 문학, 역사, 쿠란, 하디스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수집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하여 인류 문명을 확장시키는데 이바지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것은 모차르트의 오스만제국 궁전 하렘을 소재로 한 오페라인 <후국 탈출>이나 모차르트의 <튀르크 행진곡> 같은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커피가 세계적 음료가 된 데에도 튀르키예가 공헌한 부분이 크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서양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며 서양과 동양의 이분화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각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을 읽는 시간은 우리의 갇힌 시각을 인식하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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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 황윤 역사 여행 에세이,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1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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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도슨트와 함께 백제 관련 유적지를 돌며 안내받고 설명 듣는 느낌. 근데 친근하고 쉽고 재밌기까지. 이 작가님 말투 은근 중독적이다. 그런데 백제가 이렇게 수준 높고 세련된 문화의 나라였구나. 일단 지하철 타고 천호역 풍납토성부터 돌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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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나 혼자 일본 여행 - 나, 하루, 일상의 재발견
박혜진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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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해요!
하루 혼자 일본 여행에
이런 심플한 방법과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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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 시간 - 프루스트의 서재, 그 일년의 기록을 통해 되찾은 시간
박성민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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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라, 승진하라, 예뻐라, 뭘 사라, 합격하라, 이겨라, 부자가 되라 등등 세상의 외침은 거세고 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가장 중요한 '나'가 빠져 있다. '나'는 없고 허울이 앞장선 삶이 되어버렸다.

과거 달동네의 대명사이기도 한 금호동 언덕 꼭대기길 그다지 사람이 다니지도 않을 골목에 서점을 세우고 월세를 낼 수 있을까 고뇌하지만... 가장 중요한 '나'와 '나의 시간'을 찾은 사람이 있다. 프루스트의서재 책방지기 박성민 씨다.

석유눈금이 나를 응시할 때면 마음이 서늘해지지만 나의 공간이 있고 오롯한 나의 시간이 있다. 동시에 얻어지는 건 내면의 평화다.

이곳이 뭐하는 데인지 알아오라고 숙제를 내준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고, 이 작은 공간을 호기심에 차 놀이공간으로 삼은 아이도 있다. 과자를 먹기 위해 책방지기가 내준 시쓰기 과제를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냥 지나다가 꼭 한번 들어와보고 싶었다는 사람이 있고 어떻게 이런 데 서점을 열 생각을 했냐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 영혼의 따귀를 매일 맞는다는 아저씨가 잘린 손가락으로 카드를 그으며 책을 사다 읽는다. 또 자신도 이런 서점을 꼭 내고 싶다며 꿈을 갖는 사람도 만난다.

책은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곤궁하지만 희망이 가득찬 서점 프루스트의서재에 가보았다. 책읽기도 권하지만 서점에 가 내면의 통풍을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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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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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달리고 있는 마이클 샌델이 지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이 있다. 요 며칠 이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을 상대로 씨름을 했다. 책의 크기도 작고 페이지도 200페이지 정도다. 그래서 처음 책을 잡았을 때는 정말 부담이 없이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말의 늪 아니 기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몇 줄 읽다보면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멍해지곤 했다. 그럴 때는 책을 덮고 쉬었다가 다시 책을 잡기를 반복했다.

저자와 호흡을 함께 하지 못하는 책을 저자의 속도에 맞춰 따라 읽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가 말하는 많은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과 개념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의 맥락에서 롤스에 대한 비판’이나 ‘유전공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후기형이상학적인 사유의 전제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 와 같은 말은 사전에 롤스나 하버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온전히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몇 번이나 책을 덮으려 했지만 단지 끝까지 읽고 만다는 오기 하나로 후기까지 읽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사람의 유형 중에는 정리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유형에 내가 속하는 모양이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유전공학이 인간을 보다 행복해주거나 완성된 형태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력으로 비판하고 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전보다 많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늘어난 서비스들을 ‘좋다’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과 어느 선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항상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초음파로 태아의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나라에서는 여아의 낙태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인도의 경우 지난 20년 동안 남자아이 1000명당 여자아이의 수가 962명에서 927명으로 줄었다. 이런 상태는 국가적으로 명확하게 불이익 되는 일이다. 그래서 법으로 태아의 성을 진단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그러한 조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유사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유전공학이 발달하면서 의료기술이 단지 남녀의 성을 감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태아에게 어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감별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또 이러한 의료기술은 단지 태아의 상태를 검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DNA를 조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또 호르몬으로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체육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전적으로 특정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킨 선수들이 나오게 된다면 그런 선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도 키가 다른 이들 보다 작은 사람들에게 연간 약 2만 달러로 2~5년 동안 호르몬 치료를 하면 키가 5~8센티미터 정도 키를 키울 수가 있다. 그럼 농구선수가 이러한 치료를 받아 다른 선수보다 신체적 우위를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리고 신체나 뇌의 기능에 대하여 모든 것을 DNA로 조작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저자는 제기한다. 가령 돈이 있는 부모는 DNA를 조작하여 신체와 뇌의 기능이 선천적으로 우수한 아이를 낳아 사회적으로 뛰어난 경쟁력을 갖는 아이로 만든다. 그리고 돈이 없는 부모는 DNA를 조작할 수 없어 타고나기를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들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삶에 대하여 이 아이들의 결과는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부모는 아이의 DNA를 강화시켜주지 못한 책임까지 져야 하는가? 또 DNA를 조작하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부유한 집의 자녀와 가난한 집의 자녀는 다른 교육을 받음으로써 사회적 경쟁력이 다르다. 그럼 차별화된 교육을 시키는 것과 DNA를 조작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 아이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모가 아이를 골프선수로 만들겠다고 아이의 DNA를 조작하여 운동기능을 강화시켰을 때 아이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면 그것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부모가 아이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등의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

마이클 센덜은 이렇게 부모가 아이들을 유전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 부모다운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신학자 윌리엄메이의 말을 빌어서 부모다움은 ‘우연의 미래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의 욕심은 아이가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무엇이든 뛰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를 유전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부모의 욕심과 오만이 탄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이 채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부모가 아무리 욕심을 가져도 아이는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힘들다. 부모의 욕심은 부모의 욕심에 머물 뿐이다. 부모의 욕심과 다른 결과물의 아이를 부모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부모다움이란 아이를 자신의 욕심에 맞춰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어떠한 아이가 태어나든지 열린 마음으로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다움이다.

마이클 센덜은 겸손과 감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을 둔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거나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 경우 그것은 아이나 부모가 모두 키운 능력이 아니라 태어날 때 선물로써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갖게 된다. 아이가 선천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은 아니다. 이것이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이 서로 배려하고 연대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바탕이 된다. 하지만 아이의 능력이 부모가 DNA를 조작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에게 감사할 일이 없어진다. 그에 반해 DNA를 강화시켜주지 못한 부모는 부모로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회나 국가적 시스템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 크기 때문에 각자가 겸손한 마음을 갖고 사회 구성원에 대하여 감사함과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공화주의자로써 마이클 센덜은 윤리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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