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소설은 재미있어야 된다.

책장을 편 후 하품 몇 번에 마지막 책장을 넘길 수 있다면 일단 그 책은 '재미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손에 땀을 쥔채 단번에 읽은 소설이라면 굳이 '골계미' '숭고미' '비장미' 따위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미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작가'라는 폴 오스터가 쓴 '달의 궁전'도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소설이다.

책 날개에 적힌대로 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중의 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괜찮은 소설을 쓴 것만은 분명하다.

'달의 궁전'은 강한 의지로 고난을 이긴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은 아니다. 계속되는 불행에 인생을 소진시키며 살기로 결심한 주인공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여지없이 우연이 작용하고 그 우연이 되풀이 되며 또 다시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모습은 언제나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네 자화상이기도 하다.

 '달의 궁전'은 제목만큼이나 몽환적이다. 마치 악몽을 꾸는 듯 식은땀이 흐르다가도 이내 맑게 개인 하늘을 쳐다보는 것 처럼 개운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것은 바로 '우연'이다. 우연이 끼어들기에 구차한 설명이나 논리적인 필연 없이도 모든 상황이 매끄럽게 넘어가는 듯 보인다. 때문에 이 소설은 꿈을 꾸는 듯 그렇게 흐느적 거리며 전개되는지도 모른다.

마치 '위트'없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
물론 대사빨 죽이는 위트가 빠진 타란티노의 영화가 과연 '재미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주만화?

우주 만화 ㅣ Mr. Know 세계문학 10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상상초월.

이탈리아 현대문학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이탈로 칼비노가 쓴 '우주만화'는 이 한마디면 끝이다.

시공을 넘나드는 기발한 상상력과 흡인력 있는 문장. 난해하지만 깊이있는 철학이 녹아있는, 만화같지 않은 만화다.

말랑말랑한 달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1억광년 떨어진 곳에서 보낸 메시지가 적힌 게시판 등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책장을 넘길수가 없다.

때문에 '우주공간엔 산소가 없다', '공룡시대엔 인간이 살지 않았다'는 관념에 묶인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면 '만화보다도 못하네'라고 할지 모른다(물론 만화를 폄하하는건 아니다)

쉽게 읽힌다는게 만화의 장점이라면 이 책은 제목만 만화지 결코 만화스럽지는 않다.

여백없는 빽빽함 때문에 더 힘들게 읽었지만 지구, 달, 태양, 은하계까지 다룬 작가의 큰 스케일에 감탄 또 감탄이다.

"나의 피를 혁명에 바치리라"

루쉰 평전 - 나의 피를 혁명에 바치리라
주정 지음, 왕더허우 사진편집, 홍윤기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아Q'의 아버지이자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루쉰.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덧 70년이 넘었지만 그에겐 여전히 '교육자이자 혁명가', '뛰어난 문학가', '위대한 사상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중국엔 '짱꼴라'만 사는 줄 알았던 대학 신입생때다. 루쉰의 '길은 처음부터 있는게 아니다'란 유명한 말을 접했던 순간을 아직 기억한다. '어디에도 내가 갈 길은 없다'는 생각에 방황하던 내게 이 말은 절대 지울 수 없는 인생의 지표가 됐다.

이처럼 루쉰이 시공을 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거인'이기 때문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루쉰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탈에 신음하던 중국의 현실을 접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만약 그가 의사가 됐다면 어땠을까. '명의'로 이름을 날리며 거부가 됐을지도 모르고 '중국 현대의술의 아버지'로 존경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피폐해진 중국인들의 마음의 병까지 고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메스 대신 붓을, 진료기록 대신 원고지를 앞에 둔 그였지만 그 어떤 의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제국주의 일본의 압제에 신음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고 현실을 외면하던 청년들의 마음에 정의의 불을 당겼다.

20세기 초, 격변의 중국에서 문학을 통해 민중계몽에 앞장 선 루쉰.

마오쩌둥이 총칼을 앞세워 중국을 변화시켰다면 그보다 앞서 루쉰은 얇은 붓 하나로 10억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의 피를 혁명에 바치리라'

그는 갔지만 그의 피는 여전히 중국에, 중국인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

미덕과 악덕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
A. C. 그레일링 지음, 남경태 옮김 / 에코의서재 / 2006년 8월

런던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A.C 그레일링은 자신의 저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에서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중용'을 이야기 한다.

그에게 중용은 '균형감각'이다. 균형감각을 갖추기 위해선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비', '예의', '관용' 등을 성찰해야 하고 '민족주의' 나 '인종차별' '자본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이성', '소질', '사생활', '여행' 등을 아껴야 할 덕목으로 꼽았다.

특히 버려야 할 덕목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를 통렬히 비판한다. '관용'이 없다는게 가장 큰 이유다. 그에게 편협한 시각은 참을 수 없는 '악덕'인 셈이다.

61가지의 철학적 명제를 관통하는 것은 '이성'이다. 편견과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차가운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신중함'이 나오고 '타협'과 '인내'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고 있는 책은 무슨무슨 '방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방법 대신 '사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전은 그 자체로는 별 힘이 없다. 문제해결을 위한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때문에 늘 옆에 두어야 하는 책인데도 '책'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사전이 없다면 소통도, 해결도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은 복잡하게 얽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통의 방법을 제시해 주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의미'를 쫓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죽음이 예정된 수용소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평범했던 일상의 작은 것들을 모두 박탈당하고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인 공간. 그곳에서도 사람은 살아 남았고 그 이유는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얘기다.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꺾인 사람은 결국 면역력이 약해져 죽고 말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떤 시련도 겪어 낸다는 것이다.

뻔한 이야기인데도 빵 한조각과 묽은 수프 한 숟가락에 목숨을 의지해야 하는 아우슈비츠를 겪은 저자의 말은 예사롭지 않다.

이 책이 갖는 힘은 '경험'에서 나온다.

불과 두시간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동료가 주검이 된채 눈 앞에 끌려 나오고, 그 주검 앞에서 무감각하게 수프를 들이켰다는 부분에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수용소와 비슷한 공간은 군대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끌려가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면에서 수용소와 군대는 닮았다. 폭력에 길들여진다는 점도 같다. 그렇지만 결코 수용소 생활은 술자리 안주가 되지 않는다.

그점에서 기억하기조차 싫은 수용소 생활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저자의 용기는 정말 대단하다.

사지를 뚫고 나온 탈출기가 아니다.

굳센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한 인간의 솔직한 경험담이자 철학이 담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