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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예술을 합니다 일상의 스펙트럼 7
임영아 지음 / 산지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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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눈길이 간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지방의 한 도시에서 열심히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고 담담히 말하는 듯한 책 제목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이 문화 혜택을 덜 받는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상황이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예술 분야에서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는 크게 느껴진다. 많은 분야에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이루어지는데 예술 분야라고 예외일 리 없다. 이러한 여건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는 지역의 예술가들이 있다. ‘지방 예술가가 아닌 그저 자기가 있는 곳, 그 환경 가운데서 느낀 것을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이들 말이다. 프리랜서 작가 임영아가 쓴 이 책은 지방이라는 현실적인 제약 가운데서 자신의 활동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분투기다. 생생한 절망감을 마주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의문을 품고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저자의 모습이 돋보인다. 기존의 양식을 극복하여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 앞선 세대 예술가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예술가의 정신을 마주하는 것 같다.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라는 말은 속담에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엔 그 의미의 중요성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이 시대착오적인 말은 아직도 힘을 발휘하여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을 계속 재생산한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수도권, 그중에서도 서울의 위력을 비로소 체감한다. 입시 책자의 상단을 차지한 대학이 대부분 서울 소재 대학이라는 걸 발견하고 소위 서울의 주요 대학이 개최한 공모전에 참가해야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어느새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덧씌워져 버린 지방대는 의미를 두고 추구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경험은 수험생이었던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 그녀의 친구들까지 맹목적으로 서울에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예술 전반에서 지방의 인프라, 정보 부족을 경험하며 이른바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을 크게 실감하게 된다.

지방 대학에 입학한 저자는 멀리 뻗어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지방 예술 활동의 현실을 마주한다. 서울공화국이라는 현상에 익숙해져 그저 넘겨버릴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저자는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다. 의문의 핵심은 꼭 서울에 가야 할까?’이다. 저자는 ?’라는 의문을 놓치지 않는다. 그 의문은 그녀가 예술을 할 수 있는, 또한 현실을 돌파해 나갈 힘이 되었다. 작품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익숙한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미술을 하는 나에게도 서울에 가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가 많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마다 ,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라는 의문이 있었다. 디자인을, 미술을, 예술을 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을수록 부산에 대한 애증이 더욱 커졌다. (p.28)

 

서울공화국을 체험할수록 저자가 품은 의문에 의미가 더 깊어진다. 단순히 왜 가야 하는 거지?’에서 여기서도 할 수 있는데로 심화한다. ‘부산에 대한 애증이라는 표현에서 저자가 부산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 복잡한 감정이 전해진다. 자기에게 익숙한 곳인 부산에서 활동하기 위해 예상되는 어려움 정도는 감당하겠다는 의지도 언뜻 보이는 듯하다. 저자는 ?’라는 내면의 질문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또한, 어떻게 하면 그 질문이 삶과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한 자신과의 대화는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예술 활동을 만들어 나가는 시작점이 되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저자는 부산에서 활동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는 저자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났던 교수님의 격려가 컸다. 저자는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도 학생으로서 여전히 크고 작은 고민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미술로 유명한 일본 대학에 입학하려 했던 건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경험한 서울공화국을 지향하는 태도에서 배운 것이다. 어찌 보면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에게 학과 교수님은 이렇게 물었다.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거 맞니?” 머뭇거리며 라고 겨우 대답한 그녀에게 교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저자는 누군가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교수님에게서 들었다고 말한다. 교수님은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일, 바로 부산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귀국해서도 서울에서 취업하는 등 그녀가 하는 일은 부산에서 활동하고 싶은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자는 일본에서 오랜만에 그 교수님을 다시 만난다. 저자의 근황을 들은 교수님은 한 번 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 저자는 오래전부터 ?’라는 의문을 품어왔다. 끝없이 이어지기만 할 것 같았던 의문은 특이하게도 교수님에게 와서 답을 만난다. 저자가 품은 의문과 교수님이 전한 말은 말로만 볼 때는 단순한 문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발생한 의문은 그 무게 때문인지 오히려 단순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자의 고민과 의문은 그녀의 작품과 태도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교수님은 제자의 모습에서 발견한 복잡한 실타래 같은 의문에 단순한 답변으로 응답해주었다.

저자는 환경의 중요성에 관해 말한다. 환경이 작품의 소재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저자에게 환경은 부산이나 다름없다. 그녀에게 부산은 그리움의 흔적이고 향수병이며 재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작가가 이런 곳을 떠날 수 있을까. 작품에 표현되는 많은 것이 부산과 관련한 것이고 부산에서 얻은 영감에 따른 것이라면 그곳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지금까지 예술 활동을 이어왔다. 저자의 예술 인생에 또 다른 고민과 의문이 생기겠지만 그녀가 활동할 곳은 아마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작품에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저자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반응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다른 모든 글에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이야기를 풀어갔던 저자는 마지막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일상에서 예술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관한 생각만 담았다. ‘지방 예술가가 아닌 그저 예술을 생각하고 싶은 예술가의 바람을 글의 내용에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처럼 숨은 디테일로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그리는 모습에서 저자의 예술가다운 면모를 발견한다. 작은 목소리라도 내겠다는 저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그 목소리는 아마도 큰 목소리가 될 것 같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지역 예술에 대한 내 의견을 알리기로 했다.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조금씩 좋은 쪽으로 발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p.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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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 - 식물은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2022 문학나눔
이동고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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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도서관에서 인공적으로 채소를 키우는 조그마한 장치를 보았다. 태양광에 가까운 조명을 설치해 두고 상추와 같은 식용 채소를 키우고 있었다. 인류는 가까운 미래에 식량부족 현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가 진단한다. 이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에 맞서 인류도 살아남을 방법을 준비하리라는 것 역시 쉽게 예견할 수 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공적으로 채소를 기르는 것이다. 식량부족 현상을 직접 체감할 정도가 되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장식으로 채소를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러한 예측에는 뭔가 서글픈 구석이 있다. 식물을 자연과 교감하게 하지 않고 굳이 인공적인 방식으로 재배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것이다. 인류에 닥친 생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제시되는 대안이 자연스러움과는 다소 동떨어진다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도서관에서 만난 인공 장치를 보고 마냥 신기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다가올 미래의 여러 단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동고가 쓴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은 그러한 고민을 근본에서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다가올 미래를 우리에게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지금 여기에서의 마음가짐과 실천에 관해 역설한다. 이 책은 자연, 그중에서도 식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도록 한다. 요즘처럼 인문학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때도 없지만 반성성찰이라는, 인문학 본질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식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식물을 가볍게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적과 비판이기에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일까, 분명 따끔한 충고가 담긴 글이지만 부정적인 느낌이 들기보다는 더 나은 삶으로 초청하고 싶은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저자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대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 그중에서도 식물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는 우리의 태도를 꼬집는다. 가끔 식물을 가까이 두려 할 때도 있는데 그건 바로 장식으로 이용하려 할 때이다. 저자는 이를 자연의 대상화’, ‘기능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식물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더라도 에는 잠시나마 눈길을 준다. 여전히 동네 곳곳에 꽃집이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사람들이 꽃에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구나, 하고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이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저자는 식물 일생에 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새순, 봉오리를 거쳐 꽃이 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꽃이 시들고 열매가 익고 잎이 마르는 모습마저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인문적인 시각이고 전체성을 회복하는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식물의 생애 전체를 지켜보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더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지켜보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주로 시간 낭비처럼 여겨진다. 식물을 바라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일상이 너무 분주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본다는 건 소위 실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식물을 마주한다 해도 사람들의 태도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무르기 쉽다. 그저 식물의 이름을 아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안타까워하는데 이는 물론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의도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식물의 많은 부분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개념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관계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기보다는 정복하고 훼손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연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를 아주 작은 사건에서도 발견하는 듯하다. 책에는 꽃 화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며칠 간격으로 물을 주면 좋은지, 잘 안 죽는지 등 식물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저자에게 묻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럴 때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주 보세요. 자주 보시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p.24)

 

식물을 기계적으로 키우지 않았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긴 말이다. 이는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이나 식물에 무엇이 필요한지 매뉴얼 대로 적용하여 깨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앎이다. 식물의 특정 부분에 관한 관심이 아닌 식물 존재 자체에 관한 관심이다. 그러한 관심에서 비롯된 앎이 진정한 앎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를 생명의 지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종종 아이들이 흙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본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흙 놀이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흙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며 자연을 배우고 자연과 교감하는 일은 단편적인 앎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다. 돌아보면 지금의 어른에게도 유년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어느 시기부터 흙 놀이를 중단했고 그 이후로는 오직 머리로만 이해하는 공부를 했다. “자주 보세요.”라는 말에는 온전한 앎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현재형으로 쓰인 이 말에서 잃어버린 생명의 지식을 다시 찾을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기후 변화에 따라 자연의 역습이라는 자연재해가 매년 더 심해지고 있다. 우리가 이 역습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자연을 가꾸어야 한다면 그것 역시 서글픈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좋은 일은 억지로라도 실천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식물을 사랑하는 저자는 순환의 질서를 체험할 수 있는 원예 활동이 생명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시들고 결국 사라졌다가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우는 일련의 순환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이 순환의 질서와는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마치 무한의 질서처럼 끝없는 재미를 약속하는 것들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듯하지만 실은 감당하기조차 어려워 여력의 한계와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정원에 관한 글에서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페르시아말로 둘러싸인 것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나 역시 내 주위를 나름의 파라다이스로 꾸미고 싶다. 그 파라다이스를 자주 보면 알게 되는 식물과 같은 자연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순환 가운데 나도 있음을 느끼면서. 이것이 내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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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사피엔스 - 또 하나의 현실, 두 개의 삶, 디지털 대항해시대의 인류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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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운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으리라. ‘따다다단!’ 연속되는 네 음이 만들어내는 인상은 워낙 강렬해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남을 정도이다. 베토벤은 이 곡에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그의 작품에 깊은 공감을 보낸다. 실제 우리도 운명이라는 말을 베토벤의 운명처럼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곡이 풍기는 인상처럼 뭔가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든지 압도하는 힘에 휩싸인다든지 하는, 받아들이기 벅찬 어떤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을 때 그것을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운명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감당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처럼 느껴진다.


뇌과학자 김대식이 쓴 메타버스 사피엔스를 읽고 생각난 단어가 바로 운명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메타버스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가까운 미래에 메타버스가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한다. 인류는 이제 막 메타버스라는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아직 크게 체감할 정도가 아니라 그 위력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메타버스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메타버스를 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마저 부족한 일반 대중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이 상황을 베토벤의 운명처럼 여기지 않을까. 입버릇처럼 말하던 기술문명의 발전이 끊임없이 이어져 이제는 메타버스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는데 그 세계는 아직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 미지의 세계는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또 다른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이러한 공포는 베토벤이 음악으로 들려준 운명과 비슷한 결을 지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는 과연 인간에게 버겁기만 한 것일까. 메타버스 사피엔스는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오해라는 말도 떠올리게 했다. 메타버스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말이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그 충격 때문에 의미 있는 생각을 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일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메타버스의 엄습을 예고하는 요즘 분위기처럼 메타버스 사피엔스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로 꽤 충격이었다. 거창하기도 하고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이르게 될 존재의 운명이 메타버스 사피엔스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습도 어딘가 불편하다. ‘또 하나의 현실, 두 개의 삶, 디지털 대항해시대의 인류라는 부제는 일반적인 과학 서적 제목에서 흔히 보았던 문구 같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개운치 못한 책 제목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나 충격이 컸던 만큼 여러 번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생각의 흐름은 급기야 우리는 늘 변화 가운데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 변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 지혜롭게 적응도 했다. 변화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과 많은 부분 연결되었기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메타버스는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이다. 어떤 종류이든 변화는 고통과 번거로움을 수반한다. 변화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버겁다고 섣불리 여기는 이유는 그 변화가 지금의 현실과 많이 동떨어졌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큰 변화라 하더라도 그 변화를 이끌어낸 힌트는 우리가 살아왔던 현재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책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살피면서 호모 사피엔스가 메타버스 사피엔스로 넘어갈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책은 현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등은 메타버스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대개 가짜 현실로 여겨지곤 한다. 이를테면 시각 장치를 착용하고 실제처럼 그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는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진짜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각 장치를 벗고 마주한 현실은 진짜 현실인가. 저자는 책에서 현실을 근원적으로 고찰하는데 먼저 담대한 주장을 던져놓고 시작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인풋input이 아니라, 우리 뇌의 해석을 거친 결과물, 즉 아웃풋output입니다.” (p.28)

 

현실 그대로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뇌가 해석한 결과물을 현실로 경험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동물, 시각에 장애가 있는 환자, 음주 후, 꿈 등 사례를 들며 각각의 상황에서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고 말한다. 저자는 뇌의 작용에 관해 더 자세히 말한다.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인 정보를 왜곡해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뇌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망막 안의 혈관과 맹점이라는 정보를 지워서 보여준다든지 집중하는 정보 이외의 주변 정보를 지워버린다는지 체크무늬 패턴의 원을 여러 개 겹쳐놓은 그림을 보고 움직인다고 판단한다든지, 뇌는 철저히 자기 논리를 지니는 독립적인 존재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인간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뇌뿐만 아니라 심리도 현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내 것 혹은 내 편이라는 의식을 쉽게 떠올린다고 한다. 판단이라는 것 자체가 나 혹은 나와 가까운 존재에게 기울어진 채로 이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나와 내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이는 관대함이 좋은 예다. 인간에게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 게 있다면이라는 가능성 정도로 축소된다.


저자의 말 대로라면 뇌와 심리 그 외 여러 요소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러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그 사물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 사물이 각자의 시각 프레임과 심리에 따른 각기 다른 연관 관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두고 모두가 같은 사물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게 각기 다르다면 우리는 함께 있지만, 그저 섬처럼 떨어져 각자 알아서 생각하며 사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을까. 저자는 메타버스에서 희미하게나마 작은 가능성을 본다. 메타버스는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현실이라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어차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메타버스에 몸을 맡겨 보자는 것이 아니다.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일례로 메타버스에서 만들 수 있는 나의 다양한 캐릭터는 혼란을 더하는 자아 분열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게 하는 자아 확장이 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실이라는 곳에서는 시도하지 못했던 나의 가능성을 메타버스에서 더 많이 실험해 볼 수 있다. 나를 현실과 마주하게 하는 면적을 넓힘으로써 내가 서 있는 현실을 조금 더 현실과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존재했다. 이에 관한 답을 찾는 여정을 함께할 매체는 이제 메타버스일 가능성이 커졌다. 인간은 그 오래된 질문을 늘 품고 있었기에 메타버스라는 낯선 환경에서도 자기 존재에 관한 낯익은 질문을 계속 던질 것이다. 그렇게 메타버스라는 운명이 일상처럼 우리 삶에 서서히 스며들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메타버스라는 세계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이내 적응하여 그 속에서 나를 탐구하고 함께 지내는 이웃을 살피며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럴 때 우리는 메타버스 사피엔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 역시 해가 뜨고 짐을 맞이하듯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이 책을 통해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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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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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우리에게 준 기회

 

진정한 음악은 음표들 사이에 있다.” 모차르트가 한 말이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격언이나 잠언은 대개 책의 큰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는 모차르트의 말에서 책의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진정한 음악은 음표들 사이에 있다, 라는 말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음악을 감상할 때는 말 그대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감상자는 그 소리에 반응하여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모차르트가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아마 음악에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음표를 그리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악보는 그 행위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결과물이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음악은 그 음표들의 집합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음표와 음표 사이에 발생하는 물리적 공간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조건을 포괄하는 말이리라. 음표들 사이에 있는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음악이라는 세계에 깊이 들어간다면 음표를 넘어선 진정한 음악의 힘을 마주할 수 있다고 모차르트가 말한 것은 아닐까.

검은 바이올린은 음악이 중심 주제가 되는 소설이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 세계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이들이 마주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에는 음악의 매력에 빠진 두 사람이 등장한다.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와 바이올린 제작자 에라스무스이다. 요하네스는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집시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결국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신동이라 불리며 수많은 곳에 연주 여행을 다닌 요하네스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연주를 중단한다. 그 대신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인생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그 꿈이 영글기도 전에 요하네스는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점령국의 한 민가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집이 바로 에라스무스의 집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혹되어 바이올린 제작자가 된 인물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이올린 제작을 배운 그는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의 꿈은 단순히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얼핏 봐도 닮은 구석이 많다. 어린 시절에 음악이라는 매력에 빠졌고 각자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으며 아주 비범한 인생 목표를 품었다. 음악을 통해 하늘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마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만난 시점에서 에라스무스는 목표를 이루었고 요하네스는 아직 도상 중에 있다는 점이다. 에라스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소름 돋게도 그 바이올린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난다. 에라스무스는 홀로서기를 한 이후 페렌치 공작의 딸인 카롤라를 위한 바이올린을 만들게 되었다.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는 서툴렀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 에라스무스는 카롤라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에라스무스가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그가 구현하고 싶었던 바이올린 소리이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목소리를 담기로 한다.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어 그녀에게 보여주기로 약속한다.

 

카롤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 (p.138)

 

에라스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어낸다. 그 바이올린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카롤라의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카롤라에게 바이올린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그러나 카롤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목소리까지 잃었다. 망연자실한 에라스무스는 카롤라가 병들고 목소리를 잃은 것이 그 바이올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카롤라는 끝내 숨을 거둔다. 에라스무스는 이 이야기를 요하네스에게 전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과 같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에라스무스도 숨을 거둔다. 요하네스는 에라스무스가 겪은 일들과 그의 죽음을 듣고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에라스무스가 평생의 꿈으로 삼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이 요하네스 자신의 인생 목표인 오페라 쓰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의 인생은 여러모로 닮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음악이라는 세계에서 하나로 연결된 사람(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음악적 영혼”)이 아닐까 하는. 에라스무스의 원죄는 음악을 소유하려 했던 것이다. 음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이 지나치면 소유하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음악은 소유해서도 안 되고 소유할 수도 없다. 음악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한 진정한 음악은 그만큼 광활하기에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와 닿아있는 듯하다. 음악이라는 세계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한 것 같다. 에라스무스가 소유하고자 했던 음악을 요하네스를 통해서 해방되도록 말이다. 요하네스는 오페라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서 머지않아 군에 입대했다. 요하네스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가 국가를 정복해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참상을 몸소 겪었다. 이러한 정복 행위는 마치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다.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을 요하네스는 전쟁을 겪으며 느꼈던 것일까. 그는 에라스무스가 죽고 나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오페라를 쓴다. 그것도 무려 31년 동안. 그러나 이 오페라 역시 요하네스의 꿈에서도 나왔던 카롤라의 목소리를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음표를 그림으로써 오페라 악보를 완성하지만 모든 작업이 헛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카롤라의 목소리와 닮은 사람만을 찾아다닌다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질지를 예감했던 것일까. 급기야 그는 악보를 불에다 던져 버린다. 악보는 불타 없어졌지만, 그날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둔다.

소설에서 에라스무스의 죽음과 요하네스의 죽음은 다르게 느껴진다. 생의 마지막까지도 카롤라를 부르며 애타는 마음으로 숨을 거둔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요하네스는 영혼의 평안함을 느끼며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그 평안함은 음악을 움켜쥐지 않으려는 마음가짐과 연결된 것 같다. 음악이라는 세계는 요하네스와 에라스무스가 같은 사람이건 음악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사람이건 풀지 못했던 숙제를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요하네스도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더 넓은 의미에서 음악으로 연결된 우리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기회를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모차르트가 말한 진정한 음악이라는 세계에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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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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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이끌림에 응답한 사람

 

안중근을 둘러싼 케케묵은 논쟁이 있다. 바로 안중근은 독립운동가인가, 테러리스트인가.”, 하는 논쟁이다. 그가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목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그것은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함부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대의명분이 우리 생각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안중근이 생명 존중을 제일로 여기는 천주교에 몸담았기에 그가 보인 행동이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훈의 하얼빈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치른 시기를 기점으로 전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작가가 말했듯이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상상에 의존하기에 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조사하였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대화나 장면 묘사를 썼기에 이야기에서 개연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안중근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영웅 안중근만이 아닌 인간 안중근’, 더 나아가서 청년 안중근마저 느끼게 해준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 수 있어서였을까, 이 책은 위에서 말한 논쟁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소설에는 문학적 메타포로서 이 등장한다. 안중근이 경험한 가장 강렬했던 빛 경험은 세례를 받을 때였다. 이 경험은 아들 분도의 젖니를 보았을 때 다시 떠오르는데 이는 빛이 생명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이 빛은 찬란함에만 머물지 않고 안중근의 환영 속에서 일제의 폭력에 스러져 간 백성을 비추기까지 한다. 이 빛은 생명의 환희뿐만 아니라 죽음의 엄중함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안중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이 빛으로 본다.

소설에는 또 다른 빛이 등장한다. 그것은 메이지라는 빛이다. 당시 황제의 연호인 ‘메이지는 명치(明治)’의 일본말이다. 여기서 은 밝다는 뜻인데 이는 빛의 속성이다. 소설은 두 빛을 대비하면서 안중근을 명치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한다. 안중근은 왜 메이지라는 빛에는 이끌리지 않았을까. 진정한 것을 경험한 이에게 모조품은 하찮은 것이 된다. 이는 인간은 빛 자체가 될 수 없다.’라는 깨달음과도 이어진다. 소설은 진정한 빛과 유사 빛의 대비를 통해 안중근이 행해야 할 과업의 근원적 동기를 밝힌다.

빛이 주는 생명의 힘을 억제하려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안중근을 문학적으로 추적한 끝에 나온 질문이다. 안중근은 그 억제하려는 행위가 중단되어야한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그 중단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토를 쏠 때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쓰러뜨리고 나서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p.273)


소설에는 유독 되어진다라는 수동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안중근은 빛이라는 힘에 반응했다. 작가는 숭고한 생명을 기뻐하고 무고한 죽음을 슬퍼할 줄 아는 힘을 '빛'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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