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거짓말 -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
정문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도 시쓰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일 것이다.

시가 안되니 소설쓰고 소설도 안될때 평론가가 되는 거라고.

시인을 높게 쳐준다기보다 평론가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다분히 읽히는 만큼 글쓰는 사람에게 평론가들은 껄끄러운 상대임에 틀림없다. 내 글을 갈갈이 파헤치고 해부해,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그런다고 평하니..산 위에 올라가 있는 배를 끌어내리려 해봐야 힘 만 들고 점점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젠 노벨문학상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선 하루키도 평론가의 평에 시달리다 한 말이, '평론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냄새나는 마굿간의 문을 열어보는 것과 같다.'는 취지의 글을 쓴 걸 읽은 적이 있다. 열어봐야 더 구린 냄새만 확인하고 별 것 없으니 그러려니 지나가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위안이 되는 말이겠으나, 평론을 하는 사람들에겐 열 받을 얘기다.

그러나, 아무도 평하지 않아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글보다는 악평이든 호평이든 평을 당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행복한 일이라 믿는다.


대부분의 책들 말미에 그 책에 대한 평들이 실려있다. 읽다보면 읽는 사람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칭찬 일색이어서 돈을 받고 써 주는 글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정문순의 [한국문학의 거짓말]은 최소한 주례사식 평론은 아니어서 다행스러웠다. (당연하지만, '어둠의 자식들' 첫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평론에 관해서는 X도 모른다.)

 

 

이 평론집은 저자의 책머리말을 볼 때 2011년 11월에 썼다고 되어있다. 2판이 인쇄되어 나온것은 2015년 7월인 걸로 보아 최근 신경숙 작가의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유사구절 표절로 인해 재조명될 수 있는 책이라 여긴 탓 같다.

 

늦게 알게 되었다. 정문순 평론가가 이응준 작가보다 신경숙의 표절을 먼저 알고 문제 제기를 했으나 이슈화 되지 못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명예훼손에 해당되는 짐작성 글로 저자를 폄훼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ㅠㅠ


신경숙의 표절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누가 봐도 잘못한 일이다. 표절도 표절이지만 처음 표절 시비가 나왔을 때 신경숙의 태도가 더 문제였다. 메이저급 출판사의 제식구 감싸기 식 대응도 작가를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다고 해서 없던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치명적인건 작가 자신이다. 앞으로 어떤 소설을 내 놓더라도 '혹시, 이 작품도?' 의심부터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말한대로 독자도 신경숙을 향해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 독서를 해야 될지도 모른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은 여성 문학의 르네상스였다고 할 만 했다. 대표적인 작가들이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 이었는데 이 세 여성 작가들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감정의 낭비와 허위의식,1990년대 여성 작가들이라는 타이틀로 '문 닫아 걸기, 자기만족을 위한 글쓰기 : 신경숙, 낯선 통속적인 풍경 : 은희경, 연민으로 재구성한 자기세대의 특권화 : 공지영"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공선옥에 대해서만은 소녀적 잠상이나 냉소같은 감정 낭비가 자리할 곳 없는 예외적이고 희귀한 여성 주체적 목소리 성취라고 (공선옥 편에서는 여전히 시퍼런 칼날을 들이댔지만) 평한다.

저자의 얘기들이 틀리지 않다는데 한 표 던진다. 그러나, 기껍게 던지지 못한다는게 스스로도 속상하다.


소설가 은희경은 날씬한 펜싱 검객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가 독자 가슴에 휘두른 칼날이 지나갈 땐 지나가는 줄도 모른다. 나중에 핏물이 배 나오는 걸 보고서 깨닫는다. '은희경의 문장에 베였구나.' 언제부턴가 소설가 공지영은 변두리로 내몰린 난민을 대변하는 휴머니스트 같다. 곁에는 사회 변혁에 관심 갖는 독자가 적지 않다. 생각까지 따르는 사람도 많다. 비슷한 연배지만 신경숙은 다르다. 움직임이 느릿하고, 눈빛은 찬찬하며, 말수가 적다. 그녀가 겁도 두려움도 많다고 했을 때 신경숙을 처음 봤던 생태탕 집이 퍼뜩 떠올랐다. 그녀가 운전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신기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그 시대를 건너오면서 책을 좀 읽는다 싶은 사람에게 세 명의 작가에게서 위로나 카타르시스를 받지 않은 독자가 몇이나 될까? 각기 다른 성향의 작가를 접하며 나에게 맞는 성향의 글을 찾아 읽던 즐거움의 기억을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일침을 가할 때 뭔가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속상해진다. 이들의 '여류적 감수성의 충실한 답습과, 시장과 의 타협은 이후의 여성 작가들이 극복해야 할 유산으로 고스란이 남게 된(P.133)'걸 나만 몰랐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척 재밌게 읽었던 챕터는 '저널리즘적 대중성에 침목하는 언어들 :2002년 신춘문예 유감'편이다.

저자에 따르면 신춘문예는 제도 언론이 수행하는작가 선발 고사라고 정의한다. 각 언론사마다 뽑은 신춘문예 (시에 국한)작품에 대한 평과 함께 언론이라는 제도권이 문학이라는 영역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견해는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신청하고 싶었다. 문인의 선발권은 문인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그들의 혀를 자유롭게 하는 출발점이라는 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처럼 읽혔다. 


많은 작가들이 거론되고 많은 작품들이 올랐으나 대게는 읽어보지 못했고 읽었으나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 생각을 달리하며 읽기가 얼마나 혹독한 작업인가를 엿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서사의 빈곤과 문학의 윤리: 이응준, 편에서 이응준의 폐쇄적인 문학주의적 논리를 말하며 문학의 윤리와 문학가의 윤리의 관계에 대해 묻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의심한 이응준의 윤리관이 최근 문학계의 큰 파장을 일으킨 신경숙의 표절시비를 처음 제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학관이 윤리적이지 않더라도 문학가는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찰흙으로 그릇을 만들다 보면 자꾸 한 쪽으로 기울거나 찌그러진다. 손으로 모난 부분을 탁탁 쳐 올리고 기우는 부분에 흙을 돋워 가며 보완해가야 그릇 비슷한 모양이 나온다.

평론가들의 평이 모난 찰흙 그릇의 보기 싫은 부분을 싹뚝 잘라내는 서슬시퍼런 칼이 아니라 토닥토닥 쳐 올리는 위로가 되고 기우는 부분을 돋워주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평론가의 평론에 올랐다는 것 만으로도 작가로서는 문학적 성취가 어느정도의 반열에 올랐다는 얘기가 될 수 있으므로 날 선 평들이 그리 싫은 곡조만은 아니리라 본다.

표절 논란으로 얼룩진 신경숙의 [감자먹는 사람들]도 작년 대비 2.7배나 판매량이 늘었다고 하질 않은가?


그냥 읽기만 해 온 책들이었는데 평론가의 눈으로 다시 보니 이렇게 많은 의미와 이렇게 많은 사상들이 깔려있었단 말인가? 내 책읽기는 너무 가벼웠던 건 아닌가? 이렇게 전방위로 깊이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었던가? 반성과 피곤이 함께 왔다.


피곤이 좀 더 많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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