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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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휴대폰을 보고 감탄한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나무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고, 잘 다듬어 놓은 돌멩이 같아 보이기도 하는 손바닥 크기의 조각에 스크린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다. 얼리어답터는 아니지만 새로운 기계에 꽤 관심이 많은 나는 과학 기술 발전이 좋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재미있고 삶이 조금 더 편리해질 것 같으니까. 하지만 너무 빨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생각도 든다. 따라잡기 힘든 것보다도 인간미가 부족해서다. 너무 극단적일지 몰라도, 어느 만화에서 본 것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모두 아이언맨처럼 만능 슈트를 입고 거니는 상상을 하면 숨이 턱 막힌다. 꽃신에 익숙해진 원숭이가 다시는 맨발로 걸을 수 없었던 것처럼, 발전된 기술이 유행을 넘어 평범한 것이 되어 버리면 우리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답을 『천 개의 파랑』에서 찾았다.

휴머노이드 C-27(콜리)은 인간의 실수로 다른 휴머노이드와 조금 다르게 만들어졌다. 감정을 느끼지는 못해도 궁금증을 품을 수 있고 단어 구사력도 뛰어나다. 그는 기수로서 투데이라는 말의 파트너로 배정된다. 투데이도 경주마라기에는 꽤 특이한 구석이 있다. 달릴 때 행복을 느낀다는 점이다. 유별난 휴머노이드의 교감 시도로 둘은 금세 최고의 콤비로 떠오르지만, 치솟은 몸값과 함께 혹독해진 삶으로 투데이는 예전과 같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관절에 문제가 생기며 경주마의 삶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마지막 경주를 하던 도중, 투데이가 완주를 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임을 직감한 C-27은 일부러 낙마한다. 덕분에 투데이의 다리는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으나, 대신 다른 말에 밟혀 C-27은 거의 산산조각 나고 만다. 폐기 처분 위기에 놓인 C-27과 안락사 직전의 투데이를 도우려 우연재와 우은혜 자매가 나선다.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우정, 휴머노이드와 말의 우정, 그리고 인간과 말의 우정. 다양한 우정을 마주하는 와중에 우연재와 서지수의 우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워낙 천재 같은 면모를 보여 자주 깜빡했지만 연재와 은혜는 대학생도 되지 않은 고등학생 나이이다. 오로지 제멋대로인 ‘금수저’ 지수와 필요 이상으로 선을 긋는 연재가 각자의 필요로 과학 경진대회를 중간에 두고 엮이며 발전해 나가는 과정은 절로 흐뭇한 웃음을 자아낸다. 『천 개의 파랑』은 제법 시사적인 미래를 던지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상대에게 강요나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는 배려의 다른 면모까지 녹여 보여 준다. 말 그대로 “무엇도 배제하지 않”는 따스한 소설이다.

가만 보면 인간은 지구에서 다 내쫓고 오로지 인간끼리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물을 비롯한 자연을 한없이 착취할 수 있는 무한 리필 자원 쯤으로 여길 리 없다. 조금 더 스릴 있는 경마, 조금 더 빠른 경마를 즐기기 위해 떨어져 부서져도 폐기하면 그만인 휴머노이드를 기수로 앉히는 모습도, 그 와중에 말은 로봇으로 대체하지 않고 동물 그대로 혹사시키는 모습도 너무나 현실과 닮아 있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만약 땅에서 재배되는 것들로 단백질과 고기를 대체할 수 있다면, 따라서 동물과 공존하되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급속한 과학 발전에 찬성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4차 산업혁명이든 로봇에 의한 대체든 인간 사이에서만 크고 엄청난 변화지, 동물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지 않은가.

폐기 직전의 콜리를 월급과 맞바꾼 연재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실적 대신 투데이의 14일을 선택해 준 서진이 어떻게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먹고사니즘을 떠나면 인간은 그렇게 잔인해지지 않아도 된다”던 정혜윤 피디의 말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한없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중심 사회, 그리고 인간끼리의 경쟁 사회. 이 흐름을 멈추기 위해서는 몽키스패너를 끼워 넣어 급작스레 정지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 모두가 조금씩 욕심을 덜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듯 『천 개의 파랑』은 기수와 말의 우정을 시작으로 과학 기술 발전을 인간의 입장과 동물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배제당하는 사회 소외층까지 짚고 넘어간다. 무슨 일이든 휴지처럼 술술 잘 풀려 버리는 듯한 이 소설이 기가 차지 않고 사랑스럽다. 바싹 메마른 세상에 새싹을 기대하며 뿌리는 물줄기 같은 책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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