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변 사람들이 읽어도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자는 일념을 품고 있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 정해 둔 원칙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글이 완성되기까지 동일 소재를 다룬 타인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다. 읽으면서 나만의 색채가 감색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들여다볼 필요는 있지만, 직접 접하기 전에 먼저 남의 생각을 보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하면 도움 없이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석과 스포일러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에 예민하고 책과 영화, 음악을 즐기느라 때로는 약속도 거절하는 나를 “감성충”이라고 놀리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확실히 동네방네 글을 쓴다고 소문 내는 타입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는 글쓰기로 인생을 돌파한 여성 작가들의 경험을 짤막하게 실었다. 대부분이 남성 위주 사회에서 꿋꿋하게 독서하고, 나아가 글쓰기를 하나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자신이 백인이라서 받을 수 있었던 혜택을 자각하고 사회 문제를 위해 힘쓴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남성의 작품으로 둔갑하거나 여성의 이름으로 출간되어 시원치 않은 반응을 이끌어낸다. 벽에 부딪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는 의지가 그들을 올곧고 강단 있는 예술가로 이끈다.




치열하게 쓰고 싶어지는 대목.



왜곡이 아니라면 틀린 읽기는 없다.




글을 쓸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성 시인의 죽음, 쓰는 시간이 줄어들까 상을 받는 것조차 불편해했던 여성 작가,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 책 좀 좋아하거나 말 좀 잘한다 싶은 여자아이에게는 무조건 국어 선생님을 추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저마다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쏙쏙 박혔다. 부가적으로 고인을 대하는 태도, 나의 작품에 대한 타인의 해석, 사회적 문제를 향한 자세,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등 성별을 불문하고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부분들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은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흥미도 없는 글을 시작하라고 떠밀지도 않는다. 그저 글쓰기로 온전히 자신을 배출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 준다. 그 속에서 나를 찾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중 누가 가장 나와 닮아 있고 누구의 경험이 가장 인상적이라는 생각들이 전부 무슨 소용인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책 속 이야기들은 더 큰 힘을 가진다.

나에게 글쓰기는 애증의 대상이다. 좋아하지만 지긋지긋하다. 가장 잘할 것 같은데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갈증이 느껴진다.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는 부담감 때문이다. 느낀 바를 글로 최대한 옮기려는 시도가 대개 실패하기에 더욱 그렇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을 때 쓴 글은 다시 읽으면 창피하고, 감성은 배제한 채 있는 사실만 쓴 글은 목적이 없다. 재현 실패는 왕왕 스트레스가 되어 일차적 질문을 유발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왜 금쪽 같은 시간을 써 가면서 그렇게나 힘들어하느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고민이 줄어든 대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격언을 좌우명만큼이나 자주 생각한다. 생이 끝나도 작품은 영원히 남아 숨을 쉰다는 사실이 멋지다. 십 년 전에는 늙기 전에 죽고 싶었다. 지금은 어느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든, 그 전에 글을 한 편 완성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