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처음 읽고 난 뒤로 인생을 떠올릴 때마다 해변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오도카니 앉은 나는 모래사장에 글씨를 쓰기도 하며 사색에 잠겨 있다. 모래 위에 쓴 글씨가 인생이라면 허무하지만 파도가 인생이라면 그건 조금 무섭네. 그런 생각을 한다.
『파도』에는 버나드, 수잔, 로우다, 네빌, 루이스 그리고 지니가 등장한다. 소설은 각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면에서 질투하고 상처받던 아이들은 기숙학교에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퍼서벌이 인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 자리에 모인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르고, 퍼서벌이 낙마로 사망했다는 전보가 도착한다. 이후 그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중년이 되어 햄프턴 궁전에서 만나지만 열의로 가득했던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에서는 버나드가 홀로 등장해 갈무리한다.
‘갑자기 난이도가 확 높아진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 읽힌다.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험적인 서술 방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다 같이 모여서 초등학교에서 곧잘 주최하는 릴레이 소설 같다는 느낌을 주었던 대화는 몇 장을 읽고 나서야 집단적 독백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따옴표 안에 인생을 가둔다. 그 안에서도 문어체와 구어체를 넘나들고, 화자도 자주 바뀐다. 등장인물 모두가 고루 이야기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버나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후반부로 들어서며 점점 확고해졌다. 버나드에게 유일한 활기가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퍼서벌이 낙마로 사망한 직후에 특히 단적으로 드러난다. 전보가 도착했을 때 버나드는 아들을 얻고 희비를 뚜렷이 구분하지 못하며 삶과 죽음의 고리를 체감하는 반면, 그의 친구들은 오로지 상실만의 영향을 받고 허우적거린다. 이 지점에서 문득 버나드의 이야기에 특히 주의하며 읽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인생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사실은 쓸 때마다 스스로 굉장한 부담감과 무게를 느낀다. ‘정말로 이것보다 나은 단어는 없을까’ 한참 생각하고 별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택하는, 쓰고도 찝찝한 단어이다. 인생이라는 데에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것도 사소한 1초와 사소한 대화, 사소한 장면이 쌓인 탑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파도』는 그 정곡을 찌르는 소설이다. 묘연했던 인상은 퍼서벌의 송별회에서 친구들이 모여 모두의 기억에서 한 줄씩 뽑아내는 장면을 거치며 또렷해진다.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를 읽다 보면 어느새 인물들의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함께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친구이지만 생을 대하는 태도는 비슷하면서도 저마다 다르다. 네빌에게 인생은 계속 물음표처럼 남아 있지만 버나드는 타인 덕분에 “다면체”가 된다고 말한다. 수잔이 오로지 “평범한 행복”밖에 모를 것이라는 비교적 진부한 결말을 상상하는 반면, 루이스는 바로 그 “평범한 행복”은 거의 알지 못한다. 지니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들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로우다에게 인생은 무섭고 인간은 증오스럽다. 서글픈 것은 중간쯤 와서 각각의 모습이 결국 “일상의 노예”로 동일하게 귀결된다는 점이다. 꼭 저마다의 속도로, 저마다의 방향으로 내달리던 여러 줄기의 강이 결국에는 바다에서 만나는 것처럼.
그러나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야기는 정말로 많다, 실로 무수히 많다-유년 시절의 이야기, 학교, 사랑, 결혼, 죽음 이야기 등,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은 아니다.
확실히 인생은 꿈이다. 우리의 불꽃, 몇 사람의 눈에서 춤을 추는 도깨비불은 곧 꺼지고 모두가 사라질 거다.
‘틀딱’, ‘급식충’, ‘맘충’ 등 너무나도 쉽게 어떤 사람의 인생을 폄하하는 단어들이 싫다. 어떤 물결을 타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면서 일격으로 상대를 정의 내려 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라고 해도 그것들은 결국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과 이야기는 판이하다. 어떤 사람이 “판사”라거나, 어떤 사람이 “백만장자”라거나, 어떤 사람이 “몇 개의 혁명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누구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오른손이 조막손”이라는 사실은 말할 수 있어도, 그렇게 된 이유는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장식하기 위해 종종 미화되지만, 역시 그 사람의 일부이다. 때로 나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나의 것인지 생각한다. 음악 취향은 어디에서 왔고, 내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의 가치관은 무엇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놀랍게도 처음부터 내가 타고났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준 나의 일부이고 나의 이야기들이다. 친구들이 자신을 다면체로 만들고, 자신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다”는 버나드의 발언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사람은 혼자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깊다.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와 동시에 버지니아 울프는 또 다시 변하지 않는 본질을 말한다. 어떤 변화가 있든 ‘그 시절’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파편 가운데서 부서지지 않은 무언가”를. 욕구와 평범한 행복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는 자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쓰레기, 그렇게나 많은 미완성과 분리”로 이루어진 삶을 살면서 합리화 속에 잊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한 구석에서 갈망하는 부분이다. 용기도 열의도 없이 책임감을 가진 존재로 붙박여 살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요지부동으로 고정된 것”은 육체일 뿐이라고 “믿고 싶은” 모습이 퍽 안쓰럽다.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은 더욱 짠하다. 어차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거라면 치열히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삶들은 전부 무의미한 것인가? “정사각형을 들어서 직사각형 위에다” 정확히 쌓는 이들에게만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인가. 답은 당연하게도 ‘아니’다. 주어졌으니 우리는 서툴러도 쌓아야 한다. “직사각형을 만들어서 정사각형 위에” 세워놓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나름대로 “살 만”하다. 누구를 좇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주시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버나드가 막바지에 자기 자신이 “바이런도, 셸리도, 도스토옙스키도 아니고” 그들의 “후계자” 버나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라는 게 존재하긴 하느냐’고 몇 번이나 묻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인생은 꿈결처럼 무상하기에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고 기억되어야만 한다.
제목이기도 한 “파도”는 소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슬픔으로 가라앉은 이들을 건져 올려 줄 수 있는 구원으로도, 참을 수 없이 쌀쌀맞게 치는 채찍으로도, 거센 돌풍으로더, “정기적으로 멈췄다가 출발하는” 존재로도, 그저 존재하는 잔잔한 물결로도. 그야말로 인생과 사람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비유가 있을까 싶다. 부가적으로 퍼서벌의 의미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퍼서벌은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 여섯 인물의 말 속에만 존재하는데, 지도자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는 이로 그려진다. 인도로 떠날 때에도 사망한 뒤에도 여섯 명이 모이는 계기가 되어 준다. 처음에는 퍼서벌이 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인간상이나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어쩌면 그 퍼서벌조차도 계속 삶을 이어나갔다면 실망스러운 패턴으로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퍼서벌의 존재는 그대로 끝나서 더 아름다운 것, 끊임없이 부서지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자연은 너무도 생기가 없어. 자연에는 장엄함과 거대함, 그리고 물과 잎들이 있을 뿐이야. 불빛, 사생활, 그리고 한 사람의 사지가 그리워지기 시작해.
내가 기억하는 시절들을 떠올린다. 어떤 시절이 어떤 색으로 칠해져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다 같은 칠월인데 어떤 칠월은 먹먹한 솜처럼 무겁고, 어떤 칠월은 쨍쨍 내리쬐듯 따갑다. 어떤 칠월은 풀내 가득하고, 어떤 칠월은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야 “자연은 너무도 생기가 없다”는 말에 비로소 납득이 갔다. 『파도』는 중간중간 자연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간주로 들려 주며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의 구조처럼, 침묵하는 사실들 속에서 유일한 이야기로서 우리는 살아간다. 버나드는 시간이 방울이라고 말했다. 습관성은 바로 그 방울이 고이는 순간이라고. 물방울은 고일 뿐 아니라 파이게도 한다. 습관이 고인 물이라면, 파인 자국은 시간들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은 이미 비워져 있고 내가 채워 나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릇’에 관한 버지니아 울프의 비유에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를 시작하려고 한다며 입문작 추천을 부탁한다면 분명히 『파도』는 가장 먼저 제외될 작품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딱 한 권만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다 보면 삶이 공허히 느껴지고, 이토록 다채롭고 생생한 방식으로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에 찬탄한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박탈감에 뒷걸음질치기보다는 욕심이 생겨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지니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