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E. H. 카
데이비드 캐너다인 엮음, 문화사학회 옮김 / 푸른역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는 역사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고등학교 국사 수업시간에 졸지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명제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카의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 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961년 이후 지난 40년 동안 카의 역사관이 세계의 역사를 지배해왔다. 인류는 카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카의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신뢰는 쉽게 와해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현재의 역사학에서도 두터운 영향력을 발휘하는 카에게 당당히 작별을 고하는 듯한 <굿바이 E.H.카> 는, '역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여전히 카의 명제를 제시하는 대다수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책은 역사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출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런던 역사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의 발표와 회의결과를 담고 있다. <굿바이 E.H.카> 는 책의 원제 <What is History Now?> 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시대에 탄생한 카의 역사관을 넘어서,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한 역사적 시각은 무엇인지, 즉 현재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성실하게 고찰하고 있다.

현재 역사학의 지평은 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역사학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굿바이 E.H.카> 는 이러한 시점에서 그 동안 전개된 학문의 변화와 발전을 되돌아보고, 심도 있는 논의의 결과를 학계 안팎에 소개함으로써 역사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은 편집자이자 총 책임자인 데이비드 캐너다인을 비롯하여 실력 있는 역사학 전문가 9명이 각자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논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서론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 를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논의의 의의와 현대의 시대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현재 봉착한 역사학 전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서는 사회사, 정치사, 종교사, 문화사, 젠더사, 지성사, 제국사 이상 7가지의 역사분과를 하나씩 고찰하며, 결론에서는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본 연구의 궁극적 문제인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바람직한 답을 모색하고 있다.

책을 쓴 역사학자들은 <굿바이 E.H.카> 로 번역된 제목처럼, 정녕 카의 역사학과 이별하려 하는 것일까? 그들의 공통된 생각은 카의 역사관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시각으로 재평가하고 이를 통해 보완, 수정을 거쳐 카의 역사관을 뛰어넘은 새로운 21C의 역사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실증 역사관을 부정하고, 역사에 '해석' 이라는 요소를 첨가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한 카의 역사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카의 영향력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와 사회의 변모에 따라서 학문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 외적 요소 역시 변화했고, 그 변화에 부응하는 역사관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의 시대에는 역사연구를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과학으로 보았으나, 포스트모던시대의 역사는 의미 중심의 이야기, 즉 문학으로 파악되므로, 카가 강조하던 과학성 대신에 문학성이 중요시된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과거에 역사연구에 포함되지 않던 부분들이 새롭게 역사학의 테두리 속에 편입되면서 문화사, 젠더사, 제국사와 같은 영역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기러한 변화에 따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의 모색과 새로운 역사관으로의 진보와 추진은 당연한 일이 된다.

이 책에서는 역사학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실제 연구성과와 경험을 토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전문영역을 탐색하는 자세가 돋보이며, 특히 소신과 자기 열정에 매료되어 자칫 범하기 쉬운 일원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 갇히지 않고, 역사에 대해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입장을 취한 관용적 태도를 높게 평가하는 바이다.그러나 카와는 달리 철저히 역사학 전문가의 입장에서 역사를 대하는 저자들의 서술은, 아직도 카의 역사관이 최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을지,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겠다는 출판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책 내용을 접하기 전, 다소 도전적으로 다가왔던 번역제목 <굿바이 E.H.카> 의 강한 뉘앙스는, 독서가 진행될수록 나의 인식 속에서 미약해짐을 느꼈다. 카에게 '영원한 안녕' 을 고할 수 없는 것은, 아직 우리사회의 역사가, 또 이 책의 논의가 카의 역사관에 의존하면서 극복을 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책은 비록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역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역사적 자극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과 소통할 것을 권하고 싶다. 역사적 호기심과 최소한의 기반지식을 갖추고,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로 <굿바이 E.H.카> 를 접한다면,  한 권의 책으로 무한한 가치를 획득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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