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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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라는 말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일상적인 용어가 된 것이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동체하면 일종의 급진적인 단체로 여겨지거나 혹은 이단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적인 교회도 공동체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에버하르트 아놀드가 말하는 공동체는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머리글을 쓴 배질 페닝턴은 공동체를 성사(聖事)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소위 개혁교회에서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정의할 때,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이며, 보이는 교회의 표징으로 정의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공동체는 성례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내 생각하면서 읽었다. 공동체는 결과적으로 함께 살면서 먹고 마심으로서, 그것도 민족과 인종, 성별의 장벽을 모두 허물고, 특별히 가난한 자와 연대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곳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개)교회 중심, 차별이나 혐오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이러한 일이 실현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믿음과 성령의 역사다. 배질 페닝턴이 말한 것처럼 갈등 한가운데서 던져야 하는 물음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가?”이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주장처럼 때로는 국가가 하는 나름 정의로운(?) 전쟁과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옳고 그름의 당위성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성서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 해석에 가깝더라도 오히려 성경적으로 급진성(radical)을 띨 수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은사 체험보다는 공동체로 살면서 치러야 하는 사랑의 수고, 노동의 의미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에 공동체는 일상의 신비를 경험하는 곳으로 승화된다.

그렇다고 이 책은 무턱대고 공동체를 미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이 공동체의 길은 직업 생활의 현실, 인간 개성으로 인한 모든 난제의 현실 속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까닭에 치명적인 위험과 가장 괴로운 고난의 길이다”(56)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기에 공동체는 더욱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난 속에 신비를 체험하는 곳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이 책에서 수없이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야망으로 개인적 삶을 더 추구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다면 진정 공동체로서의 삶을 고민해야 한다.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기계처럼 굴러가는 까닭에, 진정한 사랑 없이도,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인격적 사랑 없이도 시늉만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말로는 공동체를 말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공동체. 아니면 목회자만 책임지는 공동체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이 책에서 공동체는 영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모든 책임과 짐을 공동체가 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서로 책임져 주는 공동체야 말로 성경적 공동체라는 것을 잘 말해 준다. 공동체는 모험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서 꼭 한번은 고민해야 하는 모험이 아닐까 생각하게 해준다. 모험의 시작이 없으면, 열매도 없다. 신앙의 여정은 모험이다. 이 책은 과감히 우리를 모험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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