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2
귄터 그라스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양철북. 두꺼운 이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거의 무의식적인 일념하나로 끝까지 다 읽은 다음 한동안 난 이 책에 대해서는 거의잊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사촌동생의 생일 선물을 고르러 아동용품점에 들렀다가 다시금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토끼, 곰과 같은 인형 또는 자동차 같은 여러가지 완구류들... 그곳 선반 아래쪽 다른 귀여운 동물인형 옆에 멀뚱히 놓여져서 왠지 조화가 깨지는 것처럼 느껴지던 빨간색 양철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양철북을 보자 문득 얼마전에 읽었던책 '양철북'이 떠올랐다책 '양철북'이 떠오르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스카르의 양철북이 놓여있는 것같았다.나는 뭔가 인연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겐 조금 비싼 가격임에도 나름대로는 무리해서 양철북을 샀다.그리고 사촌 동생의 생일날 선물로 주었다.

주인공 오스카르는 세살이후로는 키가 자라지 않는 난쟁이이다.그는 다가올 전쟁의 고통을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세살이 되던 날 그는 일부러 지하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스스로 자신의 신체적 성장을 멈추게 한다. 성장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그로써는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걸까? 나는 이 부분에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영화화된 양철북에서 이부분은 그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깊은 명장면이었다. 마치 오스카르가 관객을 향해서 돌진하는 듯한 카메라의 각도, 그리고 오스카르역의 다비드 바네트의 섬짓하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 귀기 어린 표정... 그 표정은 아마 오래도록 잊기 힘들것이다.

양철북은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함을'자라지 않는 소년'의 눈을 통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전쟁으로써 파괴되어가는소시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줌으로써 전쟁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이라는 단어의 어렴풋한 이미지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함으로써 마치 전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은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사촌동생의 생일이 지나고 얼마쯤 되었을까? 작은아버지의 댁에 들렀는데 마침 사촌동생이 없었다. 사촌동생의 방에는 내가준 양철북이 없었다. 대신 모형자동차와 조각맞추기 퍼즐, 조립용 로봇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나는 약간 씁쓸하게 어지러진 방을 쳐다보았다.그때였다. 현관문이 끼익 열리고 둥둥 하는 흥겨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한참 뛰어다니다 왔는지 통통한 볼에 장밋빛 물이 붉게 든 사촌동생의 손에는 로봇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여운 인형도 아닌 빨간 양철북이 들려져 있었다. 그순간 나는 잠시 할말을 잊고 사촌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극중의 오스카르 보다는 두살이 더 많지만 흡사 양철북을 손에들고 제멋대로 둥둥 소리를 울리는 모습이 오스카르가 내 눈앞에 서있는것 같았다. 오스카르는 저렇게 천진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오스카르는 웃고 있다! 전쟁의 아픔도 모두 잊은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전쟁이 잊혀져 가고 있는데 요 근래에 다시 화두에 오른것이 '전쟁'이다. 어른들이란 평화를 참지 못하는 성질의 동물인 걸까? 평화로울수록 전쟁에 대한 갈망은 깊어지는 걸까? 전쟁이라는 공식어로써 죄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를일이다.지금도 전쟁이 발발하거나 발발할지도 모르는 여러 곳에서는다른 얼굴, 다른 이름의 오스카르가 수없이 태어나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의 이기 때문에 모욕받고 짓밟히는 오스카르들... 전쟁은 그들을 태어나자 마자 절망이라는 단어를 먼저 알게해 줄 것이다. 나는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사촌동생을 보고서 조금전부터 시작된 뉴스에서 이라크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여자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TV를 황급히 꺼버렸다. 한창 재미나게 뉴스를 보고 계시던 작은어머니는 약간 당황하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난 그때 북소리를 들으려고 그랬던 걸까? 아니면 전쟁 관련 뉴스라서 외면해 버리고 싶은 두려움을 느꼈던걸까? 아마도 그 두가지 이유 모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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