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초반에 나는 홀로 내 자취방에서 영화를 많이 보았었다. 많이 봤댔자 주말의 영화를 빠짐없이 본 게 고작이었지만 암튼 어떨 땐 금요일밤부터 주말동안 교육방송에서 해 주는 영화까지 쟝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란 영화는 다 보았다. 방송사별로 방영 시간이 겹치면 양쪽을 번갈아 보다가 더 재밌는 영화를 선택했고.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책도 많이 읽었다. 서점에 가서 사서 보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보고 책 대여점에서 돈을 내고 빌려보는 등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가서 고전부터 시작하여 가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러고보니 어릴 때도 그랬었다. 집에 있는 내 책 읽고 또 읽다가 다 읽고 더 읽을 게 없을땐 부모님 책도 보고 친구집에 가서 빌려읽고.. 빌려오는 도중에 길에서 다 읽어서 집에 오다말고 다시 친구네 집에 돌아가서 다른 책으로 바꿔 빌려오기도 했다. 영화도 좋아해서 부모님 따라 극장에도 자주 가고 학교 동아리로 영화감상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내가 알게 된 건 나 자신에 대해서였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그런 것. 책과 영화가 나를 만들고 영향을 끼치고 키워준 것도 있었겠지.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죄다 중학교 다닐 때 읽었었다. 우리집에 있던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다 옛날책이라 세로로 쓰여 있었다. 평소 읽던 형식이 아니고 희곡이었는데다 세로로 쓰여 있으니 읽는 게 만만치 않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자를 대고 읽었다. 자꾸만 다른 줄을 읽게 되곤 해서. 그때 읽었던 작품들이 셰익스피어의 비극들 그리고 한여름밤의 꿈, 당신 뜻대로, 이런 것들과 함께 바로 이 책. 말괄량이 길들이기. 사실 그때 읽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셰익스피어가 재미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유명할 일인가 했었다. 그러면서 이걸 한글이 아닌 영어로 읽으면 글의 묘미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오랜만에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옛날 생각이 나서 길게도 주절주절 주워 섬겨봤다. 이십대때 보았던 영화중에 프린세스 브라이드라는 영화가 있었다. 로맨스, 코미디, 판타지.. 뭐 이런 쟝르인데 진지하게 보다가 약간 병맛인 그 영화에 묘하게 중독되었던 잊을 수 없는 영화로, 영화 속 영화의 형식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하며 그 책 내용이 프린세스 브라이드의 주된 이야기인 그런 형식.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그런 형식이다. 극 속의 극 형태를 띄고 있다. 극 속의 인물들이 연극을 한편 관람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극중극의 내용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주 내용이 된다. 이 책의 서막에 나오는 이야기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게 흥미로운데 아쉽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부분에 다시 나오지 않는다. 레인보우 퍼블릭스에서 펴낸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양쪽에 배치하여 문자메시지 보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대사를 주고 받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그중에서도 특히 희극은 숨가쁘게 읽히는 것 같다. 이 책은 대본이어서 그런지 만연체가 아니어서 더 빠른 호흡으로 책이 읽힌다. 그들이 나누는 대사도 예사롭지 않은데 이게 현대의 우리가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너무 재수없었을 것 같은 이야기. 그러나 말마다, 비유마다 끄덕이거나 웃게 만드는 대사들. 뭘 알고 읽으면 더 재미있는 셰익스피어. 하지만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반감을 갖게 될 소지가 있다.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봐도 좋을지.. 글을 읽고 난 후의 저마다의 감상이 오해일지 이해일지 모를 일이다. 곧이 곧대로 줄거리를 따라가보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으나 너무 터무니없다보니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을 길들이겠다고 나선 작태가) 너무나 상식 밖의 행동이라 결혼상대자를 길들이겠다고 나선 행동을 비꼬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고려해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여성들은 자기 목소리가 들리는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카나리나와 비앙카는 내 느낌에는 비중이 크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자매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들끼리 야단법석. 카타리나도 말괄량이라기 보다는 성격이 좀 못된 그런 정도.. 셰익스피어가 극중극의 형태로 희곡을 쓰고 이 극 안에서도 저마다 변장을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신분을 바꾸어 역할을 하게 한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허구 속에서만 존재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해설이 이 책의 뒷 표지에 나와 있어서 반감 없이 재미있게 읽으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 않으나 누구인척 하는 누구와 누가 누구에게 마음이 있고 없는지 등등이 초반에 몹시 헷갈렸던 것 빼고는 다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