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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는 길을 묻지 마라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20년 11월
평점 :
많은 것을 함축하는 시어(詩語)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는 시를 좀처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부족한 것은 시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의 부족일 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서 시는, 어렵지만 다가가도 싶고 이해하고 싶고 마음에 담고 싶으나 읽으면 알쏭달쏭해서 어려운 그런 쟝르다. 마음이 촉촉할 때, 그러니까 감정에 젖어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을 때만 나는 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면 알던 시도 모르게 되는 일이 생기고. 그래서 나는 시인은 모두,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 사랑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최근에 읽은 나태주님의 시산문집 '사막에서는 길을 묻지 마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비유나 은유 보다는 편지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잔잔한 글들이 시가 되었다. 책의 형식은 5부로 되어 있고 1부로 부터 4부까지는 나태주님의 시. 5부는 산문형식이다. 시를 좀처럼 가까이 하지 않고 잘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시가 연이어져 있어서 내가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처음에는 없었다. 그러나 읽어가는 동안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따로 설명이 없어도 미루어 짐작이 되었는데 맨나중에 나오는 5부 사막에 다녀와서 내가 사막이라는 걸 알았다 부분을 읽어보니 앞서 읽어 온 시들이 다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사막은 사실 내 관심 밖에 있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뜨겁고 혹은 차갑고 황량한, 죽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었었다. 그러다 사막이 아름답다는 말들을 듣게 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사막이 아름답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일까.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아름답다는 건가? 암튼 덕분에 그 후로는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거니는 것이 나의 버킷 리스트 1위로 등극했다. 아직까지는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책을 읽다보니 작가는 낙타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작가가 사막을 굳이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저자는 사막에 다녀왔고 가서 좋았고 많은 것을 깨달았겠으나 그의 시를 읽다 느껴지는 느낌은 굳이 사막이 아니었어도 그는 사막을 알고, 낙타를 알고, 사람을 알고, 삶을 알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난 나의 소감일 뿐 저자는 사막에 다녀와 비로소 해결한 것들이 있었겠지. 그리고 나는 더더욱 사막에 가 보고 싶어졌다.
읽다가 마음에 남아 책 한 구석을 접어 둔 구절들을 옮겨 적어본다.
길 없는 길
사막에서 먼 길 떠났다가
그 자리로 돌아오고 싶을 때면
낙타의 새끼를 죽여
그 자리에 묻고 어미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난다 그런다
그러면 기어코 어미 낙타
길을 잃지 않고
먼 길 여행을 마치고
제 새끼 묻힌 자리로 돌아온다고
그런다
아, 징그러운 모정이여
잔인무도한 인간들의 잔꾀여! (잔인무도)
사막에 가고 싶다
사막에 가고 싶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네 마음이 바로 사막이다
사막을 보고 싶다
사막을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네가 있는 곳이 바로 사막이다
서울이 그대로 사막이고
네가 사는 시골이 사막이고
네가 또 스스로 낙타다
네 이웃과 가족이 모두 낙타다
그렇지 않고서는 네가
이렇게 고달플 까닭이 없고
네가 그렇게 외로울 까닭이 없다
사막을 사막에서 찾지 말아라 (사막을 찾지 말아라)
어린아이가 아니가 청소년도 아니다
이제는 당당한 어른
어깨가 무겁고 발길이 또 무겁다
그러나 스무 살 당신
당신은 지금 당신 인생의 희망이며 최정점이며
가장 빛나는 보석이며 동시에 꽃이다
그걸 알았으면 가라, 세상 속으로 가라
세상 속으로 가서 세상에 물들지 말고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차라리 세상 그것이 되라
스무 살 당신이 이기지 못하면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그 어떠한 당신도 이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당신을 이겨라
당신을 참아내고
당신의 열정을 이기고 소망을 이겨라
차라리 세계 속으로 가라
가서 또 다른 당신을 찾아내라 만나라
모래밭 사막 속으로 낙타 되어서 가라 (스무 살 당신)
p.165 귀로에 오르고 보면 벌써 마음은 한국에 돌아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돌아와 가슴이 뻑뻑해서 힘이 들었다. 이미 사라진 풍경들이 아른거리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그 풍경과 소리를 지워내지 않고서는 다시금 나의 생활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그 방법이 바로 메모를 정리하는 것이고, 사진을 정리하는 것이고, 또 여행기를 적은 일이다.
p.166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주는 것은 독서와 여행과 인생의 고난과 시련이다. 고난과 시련은 사람을 낙망케 하여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않게 하거나 판을 깨게 하므로 권할 일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독서는 일상적인 일이라 평범하고 가장 좋기로는 여행이라 하겠다.
p.171 아, 우리가 한 번 지나쳐온 길을 다시 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어려운 일인가!
p.182-183 사막에는 길이 없다. 사람 발길이 닿는 곳이 그대로 길이다. 아니다. 사막에는 길이 너무 많이 발길이 헤맨다. 그것은 하루하루 우리의 삶도 그렇다. 애당초 세상에는 길이 없다. 아니다. 길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벗이여 사막에서는 길을 묻지 말아라. 그대 발길 닫는 곳이 길이고 그대가 멈추는 곳이 집이고 그대가 눕는 곳이 그대의 방이다. 그곳에 누워 하늘의 별들을 보아라. 그 별들이 그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반갑다 인사해줄 것이고 가슴 속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다. 나는 인생에게 인생을 묻지 않는다. 인생에서 길을 찾지 않는다. 인생은 그대로 인생, 사는 것 자체가 인생이고 순간순간의 숨결이 그대로 인생이고 돌아보아 모든 기억의 집적이 또한 인생이다. 그냥 살아보는 거다. 열심히 살아보는 거다. 멈출 때까지 살아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