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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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과 티미는 부부다. 이야기는 존이 풀어가지만 티미의 시점으로 쓰여있다. 결혼의 연대기라는 제목 때문에 결혼한 부부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겠지 하는 지극히 당연한 짐작만으로 책을 읽었는데 이야기는 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노르웨이 작가 기에르 굴릭센의 장편소설인데 노르웨이판 부부의 세계 같았다. 얼마전 모채널에서 방송했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첫부분만 보다 말았기 때문에 얼마나 비슷하고 어떤 면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참, 부부의 세계 원작은 미드였다.

뭐지? 부부의 세계는 전세계적으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건가?!

비현실적이라고 하기에는 그보다 더한 현실을 주변에서도 보았기 때문에 씁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존은 30대 초반의 유부남이었다. 아내가 있고 어린 딸도 있었다. 어느 날 존은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20대 중반 의대생 티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졌고 존은 아내와 딸을 버리고 티미와 결혼을 한다. 티미는 동거중이었는데 동거남에게 헤어지자고 이별 통보를 하고 존과 결혼했다. 그리고 존과 티미는 열렬히 사랑하며(?) 아들을 둘 낳고 20년을 살았다. 책에서는 두사람의 성관계를 무척 열심히 묘사하고 있는데 적나라한 듯 하지만 야하지 않고 자세한 묘사지만 읽는 나는 흥분되지 않는, 부부의 자연스러운 일상이라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암튼 연인같기도 하면서 부부로서는 자연스러운 성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꽤 자주 그런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이 많은 이유는 그들 둘이 아들들을 낳고 살면서도 서로 많이 사랑했고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였던걸까? 지면을 제법 많이 할애하여 존과 티미가 성관계를 가질 때 뭘 어떻게 했는지를 써나간 의도가 작가에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맞이한 그들의 파국은 그래서 참 허무하고 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존이 하루아침에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티미에게 빠져 아내와 딸을 버렸기 때문에 존이 티미와 아무리 진심으로 열렬히 사랑한다고 해도 둘의 사랑이 쉽게 인정되거나 지지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었다.

가끔 남편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남편이든 아내든 둘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혹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마음이 떠났을 때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배신이냐 아니냐 등을 떠나 한번 떠난 마음은 돌이키기 어렵고 이혼을 하지 않는다해도 껍데기만 붙들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를 끝내는 게 낫다고, 끝내지 않아도 이미 끝난 관계이기 때문에.. 라고 말이다.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믿어서 그랬는지, 아님 우리 둘 다를 믿지 못해서 그랬는지,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쿨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존심 상하게 붙들고 있느니 마음이 아픈 건 아픈거고 사랑을 찾아 가겠다는 사람은 보내주자는 그런 마음이었는지...)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살다보니, 배우자가 있고 자녀들이 있음에도, 어느 날 자기 생애에 '아 이게 진정한 사랑이구나' 싶은 사람을 만나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일이 설령 생긴다해도 부부라는 관계가 사랑 하나만으로 성립된 게 아니었듯이 그들 사이에는 지켜야 하는 의리와 기타 무수한 관계 그리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사랑을 찾았으니 나는 이만 떠나겠다고 하고 떠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말이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외로울때나 즐거울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때까지 사랑하겠냐는 상투적인 주례사가 나는 부부간에 참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외도, 도박, 폭력, 마약 등등과 같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자비의 여지 없이 이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엥 그럼 남편과 나의 의견이 결국은 같은 건가? ㅡㅡ;;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는데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래서 하게 된 이혼이라면 그 역시 지지한다. 그러나 존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전처와 딸을 버린 것에 대해 새로운 사랑이 정말 진실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랬는지 티미를 무척 사랑했다. 티미도 그랬고. 군나르라는 남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군나르라는 남자는 내가 보기엔 정말 평범했다. 왜 남편과 아들들을 버리고 그 남자에게 티미가 빠져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존과 티미도 평범했다. 우리도 무수히 많은 존과 티미 그리고 군나르와 존의 전처를 주변에서 만나고 있을 것이며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별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군나르를 사랑하게 된 티미에게는 더 이상 존이나 아들들의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티미에게는 군나르를 만난 뒤로부터는 군나르를 만난 첫째날, 군나르를 만난 둘째날, 그리고 셋째날...들만이 존재했다. 존은 절망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다고 해서, 수도 없이 성관계를 했다고 해서, 자식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고 해서 떠난 아내의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전처를 그렇게 떠났던 것처럼.

군나르도 유부남이었다. 군나르가 자기의 원가족에게 어떻게 하고 티미를 만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사랑이란 참으로 이타적인 것인데 시작은 늘 이렇게 이기적이다. 그들의 이기적인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 존은 전처와 딸을, 티미는 동거남과 존과 아들들을, 군나르는 그의 아내와 자녀를... 누군가의 사랑과 성취는 또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행이고 비극이 되었다. 사람이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존재로 나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과 양립하는 것이 아님에도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관계 앞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존과 티미가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존은 티미의 마음이 떠난 것을 인지했을 때에도 티미를 그리워하고 기대하고 사랑했다. 그걸 티미가 너무나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이야기여서 이런 전개를 갖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이 살아가는 내내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부부간에도 해야 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사랑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결혼이 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남겨진 배우자와 자녀들의 아픔을 보는 것이 슬펐던 이야기. 결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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