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보급판)
파이돈 편집부.리베카 모릴 지음, 진주 K. 가드너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의 프롤로그를 읽으며,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의 정의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고정불변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고, 심지어 개인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이 단어의 정의를, 이상하게 단 한 번도 의심하거나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위대한’ 이라는 정의란 어떤 특정 주류, 권력자의 시스템 안에서 가공된 것이니, 지금은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책 제목의 ‘위대한’ 은 내가 알던 그 ‘위대한’이 아니었다.
 
그 확장된 ‘위대함’ 안에서, 책은 423명의 이름을 소환한다. 지워졌거나, 빼았겼거나, 잃어버렸거나, 존재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한 이름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 유명세와 상관 없이 고루 딱 한 점씩과. 알파벳 순의 구성 역시 사려깊다. 시대와 장르 같은 인위적 구분으로 그 이름과 작품을 가두지 않는다. 체계와 구분이 (특히 예술에)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책의 구성으로 보여준다.
 
그러니 이 책은, 젠더 이슈로 해석되거나 홍보 될 작품이 아니다.  ‘확장’과 ‘전환’ 의 책이다. 여성, 남성의 구분이 아니라, 그 구분의 기준과 사고를 바득바득 지운 후 필드에 등판 할 선수들을 최대한 확장해서, 하나의 인격체 혹은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정의. 책은 그 정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의 작품과 해석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순간 ‘여성 예술가’ 의 것이라는 전제가 무의미해진 상태가 되는데, 이로서 확장된 그리고 온전한 ‘예술 세계’로서의 감상이 가능함을 경험하게 된다. 책은 페미니스트 아트의 장르가 아니라, 바로크부터 인상주의, 표현주의, 포토 저널리즘, 팝아트, 퍼포먼스, 수많은 장르를 포괄하고, 이로서 예술 역사에 여성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또한 바네사 벨이나 요코 오노가 조금 더 유명세를 탄 가족이나 연인의 이름이 아닌 독립된 예술인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부분이 특히 뭉클하다. 성별, 특수한 관계를 떠나 독립된 존재로서의 가치를 보여주는 구성 자체로, 내 안의 낡은 성벽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부끄러운 자각이라면, 알고 있었던 몇 몇의 작품이 ‘당연히’ 남성 예술가의 것이라 생각해왔다는 것. 의도적으로 혹은 당연히 지워진 그들의 이름이, 이제서야, 이제라도 기억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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