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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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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아코디언》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서울로 흘러든 아이 동이의 삶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단순히 한 전쟁고아의 성장담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동이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가난과 폭력, 시대의 격랑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며 한 인간이 자기 안의 소리를 어떻게 발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동이는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아이에 가깝다.
헤어진 엄마를 기다리고, 기도를 붙들고, 글자를 알면 세상이 조금은 덜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것이라 믿는다. 그에게 글자는 “발아래 세상에서 진짜 세상으로 건너가는 통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동이를 살게 하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아코디언의 소리다.
아코디언은 동이에게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이고, 엄마와 함께했던 세계의 흔적이며, 동시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감각의 통로다. 동이는 글자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 하지만, 결국 아코디언을 통해 세계를 느끼고 통과한다. 소리 안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 슬픔과 분노, 익살과 환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있다. 그렇게 동이는 글자가 아닌 소리로 벽 너머의 세계를 더듬는다.
이 지점에서 《아코디언》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다만 그 구원은 외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동이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며, 엄마도 쉽게 만날 수 없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양목사는 아이들을 구원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그 이름을 사용한다. 미국, 종교, 권력, 어른들의 말은 모두 동이에게 안전한 길을 열어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명관은 묻고 있는 것 같다. 구원이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삶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동이에게 그 답은 아코디언이다. 완전한 믿음도 아니고, 명확한 지식도 아니며, 성공을 보장하는 재능도 아니다. 다만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통해 자신이 선 세계의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다.
동이가 모든 벽을 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여러 번 주저하고, “분수에 맞는 자리”라는 말에 붙들리며, 끝내 시대와 삶이 만든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구원이 없었음에도, 자신과 함께 있던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한다. 자신이 온전히 건너지 못한 세계를 다음 사람에게 남기려 한다.
그래서 동이는 영웅이라기보다 증언자에 가깝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고, 고통을 통과한 사람이며, 그럼에도 타인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천명관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간다움은 지위나 성공, 선량함의 증명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몫의 상처를 품고도 누군가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에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들이 때로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독재에 맞선 시위의 함성으로 이어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동이가 마주한 벽은 개인의 불운만이 아니라 시대가 만든 벽이다. 가난, 전쟁, 고아, 미군부대 주변의 현실, 권력의 폭력은 모두 한 사람의 삶을 짓누른다. 그러나 벽은 언제나 완전히 닫혀 있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넘지 못해도, 그 뒤를 이어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도착하지 못해도, 다음 사람을 향해 길의 방향을 남긴다.
천명관은 전작 《고래》에서 민담과 신화처럼 번져가는 이야기 속에 한 여자의 일생을 담아냈다. 반면 《아코디언》에서는 노래와 소리를 따라 한 남자의 생을 들려준다. 전작이 민담과 신화의 에너지로 한 인간의 생을 거대하게 밀어붙였다면, 《아코디언》은 그 이야기꾼의 힘을 조금 더 낮고 깊은 곳으로 가져간 작품처럼 느껴졌다.
천명관 특유의 장광설과 생의 비극성은 여전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한 인물의 삶을 완성된 신화로 끌어올리기보다 그가 끝내 넘지 못한 벽과 그럼에도 남겨놓은 울림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아코디언》은 작가 세계가 더 조용하고 깊은 방향으로 확장된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잔혹하며, 끝내 가슴이 쓰리다. 하지만 그 낮고 험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듣고, 기억하고, 연주하고, 다시 걷는다.
《아코디언》이 오래 남는 이유는 동이의 인생을 신화처럼 완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이 마침내 모든 것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끝내 다 넘지 못한 벽 앞에서도, 자기 안의 소리를 따라 누군가에게 작은 길을 열어주려 한 사람의 이야기다.
구원은 밖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은 끝내 그것을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