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에라자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3
권남희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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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프랑스식 만화 '방드 데시데'로 재구성한 그래픽노블 세트가 출간되었다. 프랑스 만화가 PMGL이 그리고, 아트 디렉터 드브니의 각색을 더해 탄생한 최초의 하루키 만화화 프로젝트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평소 본인의 작품 각색에 너그럽지 않던 무라카미 하루키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후 프랑스와 미국을 거쳐 한국에서 만나게 된 작품집에는 그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다양한 단편을 만나볼 수 있다. 아홉 작품 중 먼저 읽게 된 <셰에라자드>와 <빵가게 재습격>.


셰에라자드


셰에라자드는 <아라비안나이트> 설화를 모티브로 한 단편이다. 페르시아 왕은 전 왕비의 외도 후 더 이상 여인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여인들은 다음 날 사형에 처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하지만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왕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숨을 보전했다고 한다.


소설은 이 설화의 한 줄기를 따와 이어진다. 알 수 없는 연유로 기타간토에 있는 '하우스'로 보내진 하바라를 위해 '연락책' 역할을 맡게 된 셰에라자드.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하바라를 위해 생필품을 사다 주거나 책이나 영화 DVD를 챙겨주곤 했다.


주 2회 물품 전달을 위해 만나는 사이였지만 둘은 그때마다 자연스레 침실로 향했고 셰에라자드는 한 번에 하나씩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둘의 관계는 수개월간 같은 방식으로 이어졌고 어느 날 문득 하바라는 어쩌면 그녀는 이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딱히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다지 정열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육체관계일 뿐이었지만 하바라는 셰에라자드와 꽤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고 그것은 가벼운 혼란을 초래했다. 친밀한 시간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다는 것,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라고 하바라는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남자들의 모습과 심정을 단편 소설의 형태로 패러프레이즈 한 하루키의 상상력에 그림이 더해지니 소설이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처음 마주할 땐 그림체가 너무 희화화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나중에 다시 펼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묘하게 빠져든다.


빵가게 재습격


빵가게 재습격은 1981년 출간된 빵가게 습격의 후속작으로 짧은 분량에 몹시 단순한 이야기이다. 새벽 두 시경 견디기 어려운 공복감을 느끼고 빵가게 습격 이야기를 떠올린 남편은 무심코 아내에게 과거의 일을 고백한다. 10년 전 몹시 배가 고팠던 파트너와 동네의 빵가게를 습격한 일이었다.


분명 습격은 범죄였지만 결국 습격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했더니 빵가게 주인은 지금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두 곡을 다 들으면 빵을 그냥 주겠다고 했고 둘은 얌전히 음악을 다 듣고 빵을 얻어 가게를 나온다.


이야기를 마친 남편에게 부인은 그때 습격을 성공하지 못해 저주를 받아 이 새벽에 굶주림에 잠이 깬 거고 다시 한번 빵가게를 습격해 성공해야만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부부는 차를 몰고 나와 저주를 풀 빵가게를 찾아 헤매다 유일하게 문을 연 맥도널드로 습격을 감행한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하루키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에야 드는 생각은 클래식을 사랑하고 특히 LP 음반 모으기를 좋아하는 하루키가 빵가게 습격이라는 일련의 해프닝 속에 바그너의 음악이라는 장치를 심어 소설에 저주와 참회에 대해 녹여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다가도 묘하게 스며드는 매력이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 김난주, 홍은주, 권남희 등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번역해 온 분들이 이번에도 참여해 하루키 특유의 문체를 잃지 않으면서도 글에 어울리는 그림체가 더해져 하루키를 좀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상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루키. 그의 팬이라면 꼭 한 번 만나볼 가치가 있는 색다른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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