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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연극 을유세계문학전집 130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지음, 홍재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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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두 편, 「미스 줄리」(1888)와 「꿈의 연극」(1902)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희곡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한 작품을 어떤 사조에 욱여넣는 것을 선호하지 않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미스 줄리」는 (신)자연주의극이고 「꿈의 연극」은 표현주의극인 것이다. 작가 한 명이 이렇게 다채로운 작품들을 써냈다는 게 놀라웠다. 책 한 권으로 스트린드베리의 두 면모를 알 수 있다니 경제적이다.


두 작품은 모두 희곡인데, 그 말인즉 두 작품 모두 연극으로 공연된다는 것이다. 「미스 줄리」와 「꿈의 연극」은 성격이 매우 다른 희곡이지만, 두 작품 모두 연극으로 보고 싶다는 점에서는 같다. 「미스 줄리」는 연극으로 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서 보고 싶고, 「꿈의 연극」은 이걸 대체 어떻게 연극으로 만들어낼지가 궁금해서 보고 싶다. 한국에서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을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아쉽지만, 언제 한번 상영하면 얼른 책을 들고 달려가야겠다. 두 희곡 모두 연극으로 보면 재미가 극대화되리라 생각한다.


미스 줄리


「미스 줄리」는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 희곡은 갈등으로 직조되어 있지만, 「미스 줄리」는 그 정도가 심하다. 이 갈등은 우선 인물 간의 갈등이다. '미스 줄리'와 '장'은 거의 극 내내 싸운다. 그리고 이 갈등은 인물 내면의 갈등이기도 하다. 미스 줄리는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이고, 남성을 혐오하지만 남성에게 끌리며, 백작의 딸이지만 평등을 추구하고, 평등을 추구하지만 자기의 높은 지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모순적이고 혼란에 휩싸인 인물 형상은 오랜만이다. 이에 관한 스트린드베리의 의도를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미스 줄리」에 직접 서문을 썼는데,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며 작품을 썼는지 엿보는 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스트린드베리는 "연극에서 단순한 성격을 믿지 않는다"라고 쓴다. 엄청난 무례를 무릅쓰고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우울해하는 인물이고,  오셀로는 질투하는 인물이고, 맥베스는 욕망하는 인물이며, 리어왕은 어리석은 인물이다. 그러나 스트린드베리의 인물은 이렇게 '부동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연극에서 단순한 성격을 믿지 않는다. 풍부한 심적 콤플렉스가 어떠한지, '악덕'에도 뒷면이 존재하며 이것은 미덕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연주의자들은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개략적인 판단—멍청하다, 잔인하다, 질투심이 강하다, 인색하다 등등—을 기피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나의 인물들을 과도기에 살고 있으며, 적어도 이전의 인물보다는 더 급격하고 히스테릭한 현대적인 성격으로서 보다 동요하고 엉망이 되어 버린, 그리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혼합물로 그려 냈다.

p. 16


인물의 입체성은 오늘날 문학이든 영화든 인물을 다루는 예술에서 미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스트린드베리는 그 미덕을 100년도 더 전에 천명한 것이다. 모순에 가득 찬 미스 줄리와 장의 갈등은 극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끌며, 극은 다음 단계로 발작적으로 도약한다. 이와 같은 모순과 갈등은 극의 시공간적 배경으로 인해 터질 것만 같이 응축된다. 극은 한 공간에서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미스 줄리와 장의 외적·내적 갈등을 작은 공간과 짧은 기간에 압축함으로써, 극은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요동치게 된다. 내가 「미스 줄리」를 연극으로 보고 싶다고 말한 게 이 때문이다. 「미스 줄리」가 보여주는 속도감과 압축, 극한으로 치닫는 갈등은 극장에서 구현하기에 알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극장에서 보면 연극에 정신없이 빨려들 것 같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는데, 「미스 줄리」의 특별한 점은 스트린드베리 본인이 직접 쓴 서문이 있다는 점이다. 이 서문에는 연극 전반에 대한 스트린드베리의 생각과 「미스 줄리」에 대한 그의 설명이 들어 있다. 서문과 「미스 줄리」를 비교해 보고, 스트린드베리가 연극에 관해 쓴 것과 오늘날의 연극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 확인해 보는 일은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꿈의 연극


「꿈의 연극」은 기본적으로 인드라의 딸이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는 이야기다. 그가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기도 한 사람들의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희곡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희곡은 꿈과 같기 때문이다.

이 희곡에도 「미스 줄리」의 서문과 비슷하게, 본문 앞에 스트린드베리가 직접 쓴 '기억—작가의 말'이라는 게 삽입되어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기억—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꿈의 연극」을 어떤 원리에 입각해서 썼는지 밝힌다. 세 문단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작가의 말은 그야말로 혁명적이다. 일부를 인용해 보겠다.


일관성은 없지만 논리적으로 보이는 꿈의 형태를 「꿈의 연극」에서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가능하고 진짜인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혀 의미 없는 현실 세계에서 상상들이 흘러나오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기억들, 경험들, 자유로운 공상들, 불합리한 것들, 그리고 즉흥적인 것들이 서로 한데 어울려 섞인다.

등장인물은 분리되고, 배로 늘어나기도 하고, 역할이 더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응축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한다. 하지만 단 하나의 의식만이 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것은 바로 몽상가의 의식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비밀도 없으며, 어떠한 모순도 없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평가하지 않으며, 비난하지도 않고, 오로지 관계만 맺는다.

p. 101


위에서 인용한 것이 그대로 「꿈의 연극」에 적용된다. 이 희곡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내용 전개가 너무나 혼란스럽고,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이 되고,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고, 시간이 뒤죽박죽되고, 대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마치 한 사람의 꿈을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꿀 때, 꿈을 분석하고 정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더라도 괜찮다. 왜냐하면 꿈이니까. 꿈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따라서 이 희곡을 읽을 때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읽으면 될 것 같다.

이 꿈과 같은 연극, 「꿈의 연극」을 지배하는 것은 "몽상가의 의식"이다. 즉 스트린드베리의 의식이다. 스트린드베리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희곡을 관통하는 대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작품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고통이 스며들어 있다. 가난해서 고통스럽고, 결혼 생활이 고통스럽고, 신분이 낮아 고통스럽고, 온갖 이유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한다. 스트린드베리가 이 모든 고통을 경험한 자라고 생각하니 그가 불쌍해진다.

「꿈의 연극」은 1902년 작품이다. 무의식과 꿈을 바탕으로 창작하는 극작술은 이 희곡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었다. 이 방식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 오늘날의 내가 읽어도 따라가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희곡이나 연극에서는 모르겠고, 등장인물이 분열하는 영화를 생각해 보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1975년 작 〈거울〉이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2001년 작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생각난다. 그런데 「꿈의 연극」은 1902년 작이다! 꿈을 소재로 하는 글이 아니라, 아예 꿈과 같은 글을 썼다는 게, 그걸 1902년에 했다는 게 놀랍다.

이 꿈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연극으로 올릴지가 궁금하다. 연출가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꿈을 대체 어떻게 시각화할 것이며, 꿈의 서사를 대체 어떻게 전달할 것이란 말인가? 연극은 영화와는 달리 CG도 쓸 수 없고 편집도 할 수 없다. 「꿈의 연극」을 언제 한번 꼭 연극으로 보고 싶다.


결어


「미스 줄리」와 「꿈의 연극」 모두 재미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에는 모두 스트린드베리가 직접 자기 연극에 관해 쓴 글이 딸려 있어, 희곡만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작품을 좋은 책으로 읽을 기회를 마련해준 을유문화사에 감사하며 서평을 마친다. 나는 이제 한국에서 스트린드베리의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될 때까지 숨을 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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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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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가 은근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722쪽에 “45장의 타운호호 이야기”라고 쓰셨는데 타운호호 이야기는 45장이 아니라 54장에 나옵니다. 이런 기초적인 실수도 잡아내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그리고 번역도 별로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원문을 직접 확인했는데, 번역문이 원문의 의미에서 좀 달라진 경우가 많더군요. 이것도 예를 들겠습니다.


119장에서 에이해브의 독백.

현대지성판: 오 그대 청명한 정신이여, 그대 너머에는 널리 퍼지지 않고 고정된 어떤 것이 있다. 그대에게 모든 영원은 유한한 시간일 뿐이고, 그대의 모든 창조력은 기계적이다.

원문: There is some unsuffusing thing beyond thee, thou clear spirit, to whom all thy eternity is but time, all thy creativeness mechanical.


현대지성판을 보면, 그대 너머에 널리 퍼지지 않고 고정된 어떤 것이 있다는 게, 그대의 영원이 유한한 시간이고 그대의 창조력이 기계적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전혀 상관 없는 두 문장이 왜 나란히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에이해브가 말한 바는 그대 너머에 있는 것‘에 비해서’ 그대의 영원은 유한한 시간이고 그대의 창조력은 기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이 문장을 작가정신판에서 김석희님이 어떻게 옮겼는지 봐보죠.


작가정신판: 그대 맑은 정령이여, 그대 너머에는 넓게 퍼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 비하면 그대의 영원은 유한한 시간일 뿐이고, 그대의 창조성도 기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현대지성판에 비해 원문의 의미를 훨씬 더 잘 살렸습니다. 이런 문장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번역도 별로고 편집에서 못 잡아낸 오자도 많고 개인적으로 역자님의 주석과 해설에도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책을 중고로 팔고 작가정신판을 구입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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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번역개정 2판 나남신서 1857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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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이 너무 많습니다. 비문도 많아요. 개정을 두 번이나 한 결과물이 이러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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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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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만, 그만큼 설명이 빈약하고 부실하다. 깊이 있는 지식을 원한다면 성에 안 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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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문학론
안진태 지음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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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적이고 전문적인 개념에 의존하여 논의를 진행시키는데, 저자가 과연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을 진정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문학적 사실의 변증법적 움직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냥 사실도 아닌 ‘문학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의 ‘움직임’은 또 무엇인가? 문학적 사실이 변증법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저자는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과연 저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는 걸까? 정확한 이해 없이 애매모호한 담론에 기대어 글을 써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편집이 엉망이어서 똑같은 ‘문단’이 두세 군데에 등장하기도 하고 문단 간 연결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런다. 카프카에 관해 어떤 논의가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는 괜찮으나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공부하고 읽은 건 많아도 아는 게 없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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