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 크기의 생물학
모토카와 타츠오 지음, 이상대 옮김 / 김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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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척이다. 어느덧 티셔츠 위의 가디건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따뜻한 이불보다는 시원한 에어컨이 반가워진다. 계절의 변화야 으레 있는 일이기에 새삼스러울 게 뭐 있냐 싶으면서도, 곧 마주해야 할 불청객을 떠올리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름이면 어김 없이 찾아오는 작은 거인, 다름 아닌 모기 이야기다. 고작 손톱만한 녀석이지만 가공할 파괴력을 가졌기에 등장했다 하면 경계태세를 발동해야 한다. 앵앵 소리에 잠을 설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내겐 그저 귀찮고 싫은 존재에 불과한 모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의 저자 역시 이 작은 생명체에게 관심을 갖는다. 모기 뿐만 아니라 곤충들, 곤충보다 훨씬 작은 미생물, 그리고 크기가 작은 애완동물에서부터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크기를 지닌 동물들까지 다양한 크기의 생명체들이 책 속에 등장한다. 크고 작은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건 특별할 게 없는 것이지만 저자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자연 법칙을 탐구함으로서 자신의 저작을 특별하게 만든다. 구체적인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동물의 크기와 시간 / 2. 크기와 진화

3. 크기와 에너지 소비량 / 4. 식사량, 서식 밀도, 행동권

5. 달리기, 날기, 헤엄치기 / 6. 왜 바퀴 달린 동물은 없는 걸까?

7. 작은 수영 선수들 / 8. 호흡계와 순환계는 왜 필요한가

9. 기관의 크기 / 10. 시간과 공간

11. 세포의 크기와 생물의 건축법 / 12. 곤충 - 작은 크기의 달인

13.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 / 14. 극피동물 - 조금만 움직이는 동물





이 책은 크기에 따른 차이에 착안하여 외형에서부터 근본적 구성원리로까지 논의를 이어간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서술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가령 크기와 에너지 소비량에 대한 서술에서는 크기가 큰 동물일수록 에너지 소비량이 많다는 결론을 예상했지만, 저자는 반대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에너지의 절대적 소비량은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사실이나 에너지 소비량를 체중과 결부시킨 상대적 수치는 생명체의 크기와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크기와 시간의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도 의외의 흐름이 이어진다. 우선 저자는 동물의 시간이 체중의 4분의 1제곱에 비례하고, 크기가 커짐에 따라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후 굳이 '4분의 1'이어야 하는 이유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뒤따른다. 시간에 대한 서술은 책의 제목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에 나름의 이론이 제시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토머스 맥마흔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이유를 밝히고자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솔직함(?)이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왔지만 오히려 핵심적인 부분이 물음표로 남게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한편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불친절한 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여러 논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수식이 주된 설명 도구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교양서의 수준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수록해놓았기 때문에 사실 '수식'이라 표현하기 민망하긴 하지만, 수식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로 진입장벽이 형성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연히 상관관계를 추정하기만 했던 부분들이 간단한 식을 통해 명쾌하게 해결되는 과정에서 쾌감이 느껴졌고, 수식이 언어로 기능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언어로써의 수식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책장을 넘기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시사하는 바를 하나씩 짚고 넘어가는 작업이 지난하게 이루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때때로 책을 덮고 싶기도 했지만 조금씩 계속 읽다 보니 내용이 점차 진행되었고, 생경했던 수식들도 점차 익숙해졌다. 저자의 의도를 보다 수월하게 파악하여 흥미가 커진 것 역시 유의미한 수확이었다.





시간이 몸길이의 4분의 3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은, 길이는 공간의 단위이므로 동물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일정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_172쪽







동물의 크기와 시간의 연계는 탈 생물학적 고민을 수반한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진 개념이나, 몸길이의 4분의 3제곱에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로 확대될 여지를 남긴다. 이를테면 시간이 몸길이에 비례한다는 건 크기가 다른 생물종이 서로 다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모든 존재들이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감을 의미한다. 무엇이든 몸길이가 100% 일치할 수 없기에 조금씩의 오차를 둔 채 세계를 공유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감각의 동일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당면한 현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일 수도, 또 미래일 수도 있다. 때문에 현재 내가 감각한 어떤 것이 다른 이에게 '공유하는 현재'로서 온전히 전달된다고 보장하긴 어렵다. 조금 더 이상한 방향으로 확장시켜 보면, 보통 기민하게 움직이며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속도 면에서 우위를 지니기에 높은 사냥 성공률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이들 동물들이 다른 동물종보다 빠른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먹잇감이 채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낚아채는 것일 수도 있다. 매우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이들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순간을 공유한다는 전제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동물학에서는 시간이 결코 유일하고 절대 불변인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동물에는 동물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가는 각자의 시계가 있고, 우리의 시계로 다른 동물의 시간을 단순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_171쪽







저자는 시종일관 동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드러낸다. 그에게 동물은 단지 연구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동반자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관찰이 가능했고, 또 작은 변화 하나하나까지 캐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물을 통해 세계의 구성원리를 파헤치려는 거대한 작업이 설득력을 지니게 된 것은 이러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독자의 입장에서 그걸 느끼게 되니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됐다. 피상적으로 지식을 접하는 태도를 지양하고자 했고 저자의 질문에 보다 이입하며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책을 다 읽은 후 동물학에 대한 거대한 장벽 하나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물 연구는 수의학이 전부인 줄 알았던 무지랭이에게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두께는 얇은 편이나 그리 가벼운 책은 아니다.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활자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는 게 사실이고, 생명과학에서 철학까지 방대한 학문의 영역을 넘나든다. 그렇지만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생명체의 신비와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해 파헤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접해봄직한 책이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 완독을 이뤄내고 나면 한 뼘 자라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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