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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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처럼 곧 환갑이 될 나이라서 또 아버지세대와 비슷해서 몇 번 책을 덮었다가 다시 읽었다. 아버지가 무슨 죄를 졌는지 모르겠고, 왜 아버지를 죄인으로 취급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체제의 규정에 어긋난 죄를 지었다는 이유겠지만. 이 분이 빋는 사후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염원을 드릴 뿐이다. 상욱님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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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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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잘 쉬세요. 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와 비슷한 또래로서 또 아버지 세대가 비슷해서 마음이 아팠다.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확인했고, 그저 4년의 항쟁(?)인 시간 때문에 나머지 70년 정도 삶을 힘들게 산 분에게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다. 작가님. 금연부탁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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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 P192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친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기둥이었을 뿐이다.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 - P197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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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냉정한 시선으로 술 마시는 아버지를 분석하는 사이, 아버지는 신문 한면쯤을 읽고 어렵사리 엉덩이를 일으켜 친하지 않은 노동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술은 고된 노동을 연장할 수 있는 일종의 진통제였다. 하루 세병씩 꼬박꼬박 소주를 마셨지만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은커녕 술꾼도 아니었다. 진득이 앉아 술이 제 영혼을 삼키도록 허용하는, 그러니까 작은아버지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알코올중독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는 3초 영감, 진통제 삼키듯 술을 털어넣었을 뿐이다. - P59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 중인 데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 글러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 아니다. - P65

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이부진이나 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빨갱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황사장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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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 P262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 P298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검찰관이 내 다섯 살 난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니까 아버지라 말했다고 조서에 썼다. 그 아이가 세 살 때 내가 집을 떠났으니 아이가 내 얼굴을 알 방도가 없다. 이로써 검찰 취조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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