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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예쁘다.’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는 말로 말이 주는 어감만큼이나 마음을 동그랗게 만들어 준다. 동그라미 하나에 투명한 가을 햇살에 곱게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의 노오란 꿈이, 동그라미 하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아이의 웃음이, 동그라미 하나에 마음을 다독여주는 박완서님의 잔잔한 손길이.......
이 책은 작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 박완서님의 서랍 속에 간직되어 있던 글을 엮은 것이다. 담담하고 자상한 필체를 마주하고 보니 그 분의 속내를 함께 하는 것 같은 친근함을 갖게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분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잔잔한 손길로 다독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골 벽촌에서 막내로 태어난 작가는 어머님의 유별난 교육열 덕분으로 서울로 와서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문학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으며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일제 식민지하에 있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조부모와 함께 하는 대가족 생활에서 떨어져 나와 하게 된 서울 생활은 빈곤함은 물론 정을 나눌 상대도 없어 시골에 갈 수 있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작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은 할머니, 어머니가 들려주던 풍부한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식민 종주국인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2차 대전의 와중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꽃다운 스무 살 대학생 때는 다시 6.25전쟁으로 잔혹한 세월을 보낸 경험은 훗날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작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게 그저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증언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글을 쓰게 되기까지 복수와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쓴다는 게 진실을 바탕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글을 통해 읽는 이가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책 속에 실려 있는 문학 강좌 대담록을 통해 작가의 문학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애호가이며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로부터 소질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교과서에 실린 자신의 글을 분석하고 문제를 내는 것 보다는 그저 감동을 주는 글로 남기 바란다는 것을, 무엇에 감동을 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혀서 그것이 발효가 되어 폭발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작가는 시간을 통해 함께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자주 다녔던 음식점으로 가족모두 마지막 소풍을 다녀 온 후 가슴 속에 남아있는 아픔으로 찾지 않았던 그 곳을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는 예전처럼 맛있게 식사를 하는 자신을 보며 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신과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 ‘시간’ 오랜 친구로 화가였던 이가 암으로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곁에 자고 있던 아기의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보고 임종의 자리에 생명력을 불어놓는, 아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 아들을 잃고 얻은 손녀에게 마음 붙이며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현실을 살아가는 힘은 지난 세월에 대한 기억의 애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 기억의 창고’
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 때, 누구나 한 번 쯤 꿈꾸었을 문학소녀로 여름방학 동안 50권으로 된 한국문학전집을 무작정 읽었던 기억,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우쭐해하던 모습도.......
다른 무엇보다도 작가의 글이 잔잔하고 푸근하면서도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는 것은 작가가 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으로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고 옳지 못한 일에는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작가를 통해 깨닫기 때문이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쓴 ‘깊은 산속 옹달샘’은 애틋한 마음에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셨던 법정스님과의 일화를 통해 깊은 산속 옹달샘은 길 잃은 나그네에게 목을 축이게 하는 것은 물론 큰 강에 이르렀을 때 그 강이 이미 오염되어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남게 해주는 임계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 임계점이 우리 사회에서는 높은 정신으로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정말이지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되고 앞으로 삶의 방향도 짚어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아는 척 하고 때로는 내 기준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저울질하며 가끔씩은 남보다는 내가 먼저라는 생각으로 거침없었던 행동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조차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하면서 어느새 나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날들을 버티어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누가 건들기라도 하면 날카롭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러다 보니 몸이 지치고 마음도 따라 지쳐 살아가야하는 의미조차 갖지 못했었다. 그런 나에게 작가는 얼마간 부족한 것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작가가 존경했던 분들,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담백하고 무욕하고 깨끗하고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셨던 피천득 선생님, 장애보다는 당당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장영희씨, 우리들에게 도덕적인 지주로 끊임없는 환기로 우리 정신을 잠들지 못하게 한 어른인 김수환추기경님, 문학에 대해 누구보다 도도한 자존심을 가졌고 가지실만한 박경리 선생님, 어떤 작가보다 책을 많이 읽는 작가로 역사의 격량 한 가운데 서서 근세사의 진실을 목격자로서 증언하는 실록에 가까운 방법으로 소설을 쓴 이병주 선생님......
나는 작가와 함께 했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작가이기 보다는 할머니로서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다정함도 갖게 해주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제 더 이상 작가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워지면, 세상에서 예쁜 것이 보고 싶어지면 우리는 다시 그 분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보게 될 것이다 그 분의 글처럼 잔잔하고, 깨끗하고 예쁜 천국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