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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그리다 - 머물면 비로소 보이는 제주
최예지 글.그림 / 버튼북스 / 2016년 7월
평점 :
“흘러가는 대로 살자. 발길 닿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자‘
억새로 이루어진 새별오름에서 개화할 무렵부터 지는 모습을 보며 저자가 했던 다짐으로 지금은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제목처럼 이 책속에는 저자가 그린 제주의 모습이 담겨있다. 대부분의 사진이 주는 선명함과 정확함과는 전혀 다른, 저자의 손끝에서 생각과 느낌을 담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특히 꽃들과 함께 하는 제주의 열두 달은 처음으로 접해보는 특별함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가지 제주는 그저 여행지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곳을. 그것도 빠듯한 일정으로 돌아보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이렇게 진짜 제주의 모습을 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선화, 유채꽃, 벚꽃으로 화사한 봄, 낮달맞이꽃, 수국, 해바라기, 수세미꽃, 부용화로 풍성한 여름, 천일홍, 메밀꽃, 억새로 고즈넉한 가을을.
가슴이 싸아해진다. 나에게 제주는 어느 날 무작정 찾았던 곳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품어주었던 곳이다.
태풍을 몰고 오는 바람에 몸살을 앓는 파도의 뒤척임을 바라보며 남편이 가장으로서 짊어졌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이해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앙증맞게 서 있는 빨간 등대를 보며 아이들이 각자의 길을 잘 걷기를 바라고,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담 길을 거닐며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했던 나들이를 되살리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러다보니 꽃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갖기 못했었는데 이제나마 책 속에 피어있는 꽃들을 찬찬히 둘러보게 된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귤꽃은 돌담 밖으로 주렁주렁 귤을 매달고 있던 귤밭을 떠오르게 한다. 두서없이, 크기도 제각각인 귤을 보며 감탄을 하고 얄팍한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먹으며 맛보았던 달콤함이 전부인줄 알았었는데 꽃이 핀다니, 그것도 눈이 내린 것처럼 햐안 꽃이, 거기에 달콤하고 깊은 향까지.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본다. 향긋한 내음을 가슴에 담고 싶은 바람으로. 그리고 저자가 부러워진다. 이렇게 꽃으로 제주의 열두 달을 그릴 수 있으니.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게 아니라 보통의 일상을 제주에서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면 가득 피어난 꽃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각각의 자리에서. 진하고 옅은 향으로 나를 붙잡아둔다. 그래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머물러야 비로소 제주가 보인다는 말처럼 저자는 꽃을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삶속으로 들여와 많은 것을 얻게 한다. 어쩌면 그 맛이 진짜인지도 모른다.
제주의 일상을 함께 하며 조금씩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아 반가웠다. 세화오일장의 생선삼춘의 부지런함, 곡물할망의 넉넉한 마음, 덕구와 할아버지의 무심한 정겨움, 아기 멍뭉이들의 작은 웃음, 직접 겪지 않았어도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정겨움이 스며든다. 그리고 보통의 일상에서 얻게 되는 것들은 삶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해녀들이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말리고 삶는 일상에서 과정의 아름다움을 보고,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일상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고, 동산에 올라 보게 되는 일상에서 삶의 주인공으로. 동쪽마을 끝에 있는 소심한 책방으로 놀러가는 일상에서 다른 이의 지혜를 찾고.
정말이지 저자의 입고 손을 통해서라면 보통의 일상이 의미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주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무심한 생활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지내다보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행복을 운운하고 있으니......
저자의 집이 있는 하도리에서 소심한 책방이 있는 종달리까지, 검은 바다 공천포에서 강아지 레고의 산책일은 저자가 진짜 제주를 만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지명조차 낯선 곳이지만 길을 따라 가다보니 금세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정겨운 인사, 눈앞으로 펼쳐지는 모습과 나름대로의 이름으로 서 있는 건물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낭, 늘 한결같은 산책길에서 계절마다의 제주를 맞이하는 그 모습이 진짜 제주, 머물러 살아야 볼 수 있는 제주였다.
오늘 내가 본 제주는 행복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작지만 무한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상이지만 의미를 찾게 하고, 변함없지만 늘 바뀌어가는, 열 두 달 꽃이 피고 지고, 굽이굽이 올래길을 오르고 내리며 그 속에서 삶의 깊이를 더 해가는 곳이었다. 그 한쪽 켠으로 나를 밀어 넣어본다. 그래서 제주는 나와, 우리의 삶이 함께 하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고맙게도 저자는 나를 위해 다음을 약속해주었다. 군데군데 남겨놓은 여백을 채우며 나만의 제주를 그릴 수 있도록,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내 손으로 제주를 그려봐야겠다. 싸함대신 아름다운 꽃들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가득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나만의 제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