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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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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세력을 더욱 키웠던 대기업들의 독점적 횡포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미세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갔고 2000년 이후에는 동네 골목상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동네 소형 슈퍼가 가장 흥행했던 것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이 당시에 배달 슈퍼를 하면서 돈을 꽤나 벌었다는 이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늘날의 동네 골목은 대기업을 등에 업은 편의점들이 깨끗이 평정해 버렸다. 편의점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어느 새 그 문화에 익숙해졌고 편의점이 제공하는 편리한 편의성을 기꺼이 수긍할 뿐 아니라 즐거이 누리게 되었다.

권여름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는 정읍의 작은 슈퍼마켓 집 딸 은동의 시선으로 대한민국 슈퍼마켓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다. 필성슈퍼는 원래 은동의 고모가 운영하던 가게였는데 돈깨나 번 고모는 서울에 건물을 올리면서 상경하였고 위도에 살던 동생인 은동이네 아버지가 막차를 타듯이 물려받게 되어 위도에서 정읍으로 이사 나오게 된 것이다. 은동이네 부모는 고모네처럼은 아니더라도 자식들 건사하면서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도시에 대형슈퍼가 번갈아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고 이때부터 필성슈퍼의 눈물 겨운 고군분투가 전개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슈퍼마켓 역사의 흥망성쇠를 어떤 서사로 들려주나?

선두에는 은동이네 부모를 따라 위도에서 정읍으로 나온, 약간은 가모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할머니가 있다. 위도에서는 바지락 장인으로 대접 받으면서 가솔을 이끌었으나 온통 글자 세상인 도시로 나오니 할머니는 말 그대로 어리바리한 노인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원조 까막눈이니 슈퍼가 바빠도 카운터를 봐줄 수 있나 애들 공부를 봐줄 수 있나. 쌈짓돈을 풀어 집안 식구들이 먹을 쌀을 필성슈퍼에서 구입해 대는 것으로 겨우겨우 자존심을 세워 보는데....그러던 어느 날 문맹이라는 사실을 그만 은동에게 들키고 여차저차 하던 끝에 둘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진다. 할머니는 은동에게 한글을 배우고 은동은 수업료를 받아 조금씩 챙기면서 새로운 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은동의 꿈은 배우가 되기 위해 전주에 있는 배우학원을 다니는 것. 처음에 손을 덜덜 떨면서 시작한 할머니의 한글 공부는 가족의 이름 쓰기, 슈퍼의 물건들 이름 파악하기로 확대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글자를 배운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일까. 글자(언어)는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음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글자가 곧 법이자 윤리이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경우라는 것도 글자에서 나온다. 그런데 공룡처럼 몸을 키워나가면서 골목 상권을 상심시키는 대형슈퍼들의 경우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알며 실천한다는 것이 또한 글자의 힘이다. 위도의 여장부 할머니, 바지락 장인이던 할머니가 가족이 처한 위기 앞에서 일어나 세상을 향해 글자를 내민다.

그 밖에도 배우가 되기 위한 은동의 서사가 있고 연극반이지만 연극은 안하고 싸우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학교 연극반의 활약이 있다. 이 이야기들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가 뜻 모르고 지나쳤던 지난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저마다의 빛을 밝히며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을 잔뜩 안긴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크고 작은 슬픔, 어려움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자존심의 무게를. 사랑과 화합의 힘이 가져다 주는,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이 곧 생명줄이라는 것을.

너무 힘들어서 재충전이 필요할 때 읽으면 기운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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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소년 물장수 탐 청소년 문학 33
박윤우 지음 / 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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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매우 품격 있는 글체였습니다. 가려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적절하게 안배되면서 파격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있게 잘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한창 배워야 할 어린아이들이 노동 현장으로 내몰리고 월급도 못 받는다는 설정은 그것이 아무리 일제강점기라고 하더라도 가슴을 메이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

 

<달려라, 소년 물장수>의 가장 큰 미덕은 리얼리티에 천착한 서술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어디 한 군데 과장을 하거나 인위적인 거품을 통해 포장하려는 시도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오직 충실하게 당시의 삶을 복원하고 재현해내는 데만 집중합니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기존의 주류역사가 배제해온 것, 누락시켜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버렸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민족적 현실을 거론하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매진하자는 주장만이 당시 유효한 투쟁 구호였습니다. 논쟁도 주로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열 몇 살에 불과한 아이들의 월급 몇 푼 정도야 끼어들 자리도 없었고 존중 받기도 어려웠지요. 나라가 독립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도 강했습니다.

 

소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월급문제가 소설의 단독주제가 되기에는 주제의식상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하찮다는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요. 비슷한 맥락으로 독제타도를 외치던 서슬 퍼런 1980년대를 기억합니다. 당시 아주 사소한 학내 문제 같은 것은 그것이 당장의 교내 생활에 있어 아주 곤란한 문제였어도 집회장소로 가져가기에는 누구나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져가더라도 개량주의, 수정주의라는 욕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오직 독제타도만이 올바른 구호라고 판단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일제강점기 밀린 월급 문제는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월급이 밀리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커다란 구호만을 내걸고 싸웠을까요? 당시의 신간회가 이러한 사업에 주력했음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겠지만 신간회는 주류역사에서 그저 곁가지로 취급당해 온 게 사실입니다. 이 소설 <달려라, 소년 물장수>는 신간회라는 애국 단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혁명세력을 단결시키자면 민족의 주요모순 아래 세세한 것들을 집결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위구호를 하위구호 자체로 찢어 놓기만 하고 하나로 모으고 통합하지 않았다면 3.1운동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2000년 이후의 버전입니다. 주류역사에서 삭제 당하고 배제되어온 민초들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알차게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역사를 이렇듯 끝없이 다시쓰기 해야 할까요?

 

하나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1930년대로 돌아가 그 시절을 다시 살아 내거나 그 시절을 다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버전으로 그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지금의 삶을 바꾸자는 것이고 바뀐 시각으로 그 시대를 다시 보면서 의미를 전도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놓쳤던 부분을 복원해야 가능해집니다. 그래야 온전한 역사, 살아 있는 진정한 역사입니다. <달려라, 소년 물장수>는 우리들이 놓쳤던 것에 다시 초점을 맞춤으로써 굳어버린 우리 역사의 근육을 말랑말랑하게 되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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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학교 사과밭 문학 톡 14
오서하 지음, 국민지 그림 / 그린애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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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없어진다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쓸모를 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 가치 없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는 냉혹한 평가를 내립니다.


컴퍼스 회사 사장인 최고남 회장은 지구의 쓰레기를 4차원 무저갱 속으로 버리는 사업을 통해 차기 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리기로 분류된 쓰레기에는 폐교된 학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교가 쓰레기라니,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버려지고 있는 학교가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공교육의 부실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학교는 쓸모마저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 동화 속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의 집 근처 초등학교도 폐교된 모양입니다. 폐교된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이 찾지 않고 점차 우범지대처럼 변해갑니다. 작가가 경험한 그 사건이 이 동화 <사라진 학교>에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이 동화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무저갱으로 사라지고 있는 학교에 키위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들고 그 고양이를 뒤쫓던 소녀마저 휩쓸려 함께 무저갱 속으로 버려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 학교에는 블랙이라고는 고양이도 있었고 알을 품은 쇠박새도 살고 있었던 겁니다. 이를테면 버려진 학교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 생명체들이 모여 생명활동을 열심히 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던 거예요.


키위를 찾아 학교로 뛰어든 연우는 알을 잃어버린 쇠박새를 만나고 불랙이라는 검은 고양이도 만나 이런저런 사연을 듣습니다. 아마도 키위 역시 그 사연의 일부가 되어 학교 속으로 뛰어든 게 아닌지 연우는 생각합니다. 키위는 블랙과 결부되고 쇠박새와 쇠박새의 둥지가 있던 느티나무는 연우와 연우의 아빠로 연결되면서 다시 키위에게로 이어지며 이야기는 순환됩니다. 최고남 회장과 그 사회가 학교 하나를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 안에서 살아가던 수많은 생명들이 설 자리를 잃고 둥지를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연우에게 학교는 아빠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학교가 사라지면 느티나무도 사라지고 느티나무를 매개로 한 추억도 사라지고 느티나무에 기대 살았던 생명도 사라집니다.


무저갱 속으로 버려지는 학교에 연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AI를 보내 구출작전을 펼칩니다. 하지만 조건이 붙습니다. 구조로봇 트롤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은 딱 한 명. 연우는 과연 키위와 블랙, 쇠박새를 두고 홀로 지구로 귀환할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학교의 위기가 흉흉한 소문을 넘어 현재형의 사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학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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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 2023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박숲 지음 / 청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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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는 공식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은 여자가 남자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야만 연애가 시작된다. (희귀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넌 치마를 입으면 예뻐. 난 머리 긴 여자가 좋아. 남자는 은연중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여자는 또한 은연중에 남자의 취향을 따라간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니, 그렇게 할 때 사건이 만들어진다.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남자를 따라 가는 게 싫어 그의 프레임을 거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평생 짝사랑만 하는 사람들의 고질병은 남의 기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가 나를 어떤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해 지지부진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려면 상대가 어떤 프레임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잠시 행복을 누리지만 곧 시들해지는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남자의 요구는 점점 다양해지고 때로는 거칠어진다. 여자를 통제하려고 한다. 여자는 숨이 막힌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녀는 그의 프레임을 뛰쳐나온다. 연애는 깨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남자가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쳐놓은 프레임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여자를 따라 간다면 연애는 계속될 것이다. 깊어질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는 어떨까. 부모도 자식에게 프레임을 씌운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네가 알아서 선택해, 라고 말하지만 대체로 거짓말이다. 특히 아버지가 지나치게 폭력적인 프레임으로 자식의 인생을 좌우하려고 하면 자식은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의 삶을 살기 어렵게 된다.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만 '나'의 인생을 찾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방법은 연애의 공식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성장했다면 아버지의 프레임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거기가 그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우빈의 아버지는 지독하게 폭력적이다. 짓밟고 두들겨패는 일이 거의 일상이었다. 우빈은 자신의 적성과 특기에 따라 인생을 사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얼마나 지독한지 아버지는 심지어 자식에게 살인자라는 프레임까지 비밀스럽게 걸어놓고 그것을 무기로 자식을 지배하고 자기 입맛대로 관리한다. 더 이상 숨쉬기가 어려워졌을 때 우빈의 발버둥이 시작되고 마침내 집을 뛰쳐나온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을 죽여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집착하는 아들의 목숨, 그것을 가장 비참한 형태로 훼손해 죽여버리는 것. 그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집을 나와 어느 허름한 여관에 머물지만 기타 소리가 그의 자살을 방해한다. 게다가 너무 엉터리로 쳐서 그런 소리 속에 뭍혀 인생을 끝낸다는 것은 너무 비참하고 모욕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우빈은 안 되겠다 싶어 여관을 나가 기타소리를 찾아나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지점에 계속 마음이 갔다. 죽음을 결심한다는 것은 상속을 거절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동안 아버지가 이룬 성취, 자식에게 무기처럼 휘두르는 그것을 거절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가 서야 가능한 일이다. 집을 나오는 순간 그와 같은 용기는 기적이 되어 다른 세상을 열어젖힌다.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면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지만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우빈이 맞이한 타자들은 다행히 아버지와는 다른 보통사람들. 그들은 우빈에게 어깨를 내어줄 것인가.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기로 결심한 우빈은 루시퍼를 연주하는 주체가 되어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줄거리가 탄탄하고 꽤 재미있는 소설이다. 상처 받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이웃과 연대해야 하며 타자로서의 그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아버지라는 늪에서 빠져나온 우빈에게 이웃이라는 새로운 신이 등장해 손을 내밀고 어깨동무하고 음악의 길을 열어나가는 과정은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그의 미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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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지손가락 숨쉬는책공장 청소년 문학 4
이주현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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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학의 실상을 생생하게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현실이 청소년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는 점도 좋았습니다.

 

비혼모인 서준의 어머니는 서준과 같은 나이의 딸을 가진 사업가 남성과 결혼해 두 번째 가정을 이룹니다. 성별이 다른 고딩아이들이 재혼가정의 남매가 되어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불편할까요? 집이란 필요할 때는 마음대로 옷을 훌떡훌떡 벗어던지고 아무렇게나 누워 뒹굴거리는 곳인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없어 불편하겠지만 상대방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하게 되니 여간 긴장되는 곳이 아닐 것입니다. 무장해제가 불가능한 곳이라면 집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키가 작고 왜소한 서준은 학교에서 온갖 셔틀에 왕따를 당하며 단 한 명의 친구 만들기에도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은 폭력을 당해 엄마가 학교에 불려가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갈 것을 권유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잘잘못을 떠나 엄마는 기가 죽고 진이 빠집니다. 새아빠와 의붓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사회의 전통적 통념으로 볼 때 서준과 엄마 사이에서 서준은 가장입니다. 가장이 되어 엄마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더 힘들게 만드니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필요합니다. 서준은 엄마의 기를 살리고 가정도 살릴 방법을 찾다가 중국유학을 결심합니다. 아직 청소년이지만 엄마를 보호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믿고 있으니 이미 늠름한 가장입니다.

 

유학길은 곧 자립의 길이 됩니다. 쉽지는 않겠다 싶었지만 너무 많은 난관과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중국 유학원의 실태는 열악하였고 온통 엉터리입니다. 먹고 산다는 명분 아래 여기 저기 가시덤불이 잠복해 있기로는 우리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서준은 중국의 고등학교에 입성하고 중국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웨이라는 친구를 만나 감동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갑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던 친구관계가 중국에서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중국산 하면 거의 사기나 속임수, 불량품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중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나름의 윤리기준과 규범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리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인정과 이웃애, 우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참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웨이라는 소년의 성격구축입니다. 웨이가 중국에서는 흔한, 청소년의 전형을 이루는 캐릭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청소년소설의 등장인물로 볼 때는 지극히 새로운 인물입니다. 웨이와 웨이 가정의 구성원 모두가 그렇습니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나 경이롭습니다. 중국을 직접 겪고 체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청소년소설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재미있고 또 의미도 깊습니다. 외국여행을 하면서 외국문화생활을 전격 도입한 소설들이 있지만 외국문화를 생생하게 잘 살렸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자의식(한국형 문화관)으로 외국문화를 재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러한 소설들과 결을 달리함으로써 웨이라는 인물을 우리 소설의 성과로 구축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 어른들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1970,80년대의 인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명백히 지금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합리와 이성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제 자리에 두는 구실은 할지언정 인정이 스며들 공간은 없애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는(합리와 이성에서는) 사랑이 배겨낼 수 없을 거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 소설의 가장 큰 성과는 서준의 홀로서기의 감동, 성공이라기보다는 웨이와 같은 인물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서준의 축복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준 이야기를 통해 중국과 중국사람들을 다시 보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인정이 살아 있는 그곳을 훼손시키는 것이 한국인들의 자본주의적 문화관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국에서 왕따 당한 아이들이 중국으로 도피유학을 와 그곳에서는 다른 아이들을 왕따 시키는데 몰두 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씁쓸한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재미있고 생생한 책입니다. 학부모와 청소년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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