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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 - 여성 영웅 서사의 세계
게일 캐리거 지음, 송경아 옮김 / 원더박스 / 2025년 8월
평점 :
'시작하는 말' 1페이지가 전체 368페이지를 함축한다. 책을 짓는다는 과업을 완수한 영웅의 서사를 흔히 그러듯 근엄하고 멋들어지게 풀다가, '아, 이게 아니지' 하며 같은 내용을 솔직하고 친밀한 이웃의 서사로 바꿔서 다시 푼다. 여성 영웅의 서사가 남성 영웅의 서사와 이야기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는 점을 단 1페이지에 실어서 보여준다. 단숨에 몰입감과 책의 콘셉트를 전달해주는, 근래 들어 가장 매력적인 '시작하는 말'이다.
최근에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여성 히어로를 내세운 작품들이 뭇매를 맞곤 했다. PC주의를 강제하며 관객을 가르치려 한다거나, 캐릭터에 대한 고민과 서사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저자는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는 이런 거부감은, 보편적인 영웅 서사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서사가 낯설어서 일어나는 반응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보편적인 영웅 서사는 남성 영웅 서사고, 새로운 서사는 여성 영웅 서사다.
저자가 남성 영웅 서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는 작품은 <원더우먼>이다. 주인공이 여성이니까 여성 영웅 서사 아니냐고? 아니다. 원더우먼 '이야기'의 성별은 전형적인 남성이다. 요즘 말로 하면 '테토 스토리'다. 원더우먼은 남성 영웅 서사의 구성 요소와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참고로 원더우먼의 작가는 윌리엄 몰턴 마스턴, 남성이다.)
반대로 '에겐 스토리'의 대표적인 작품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다. 해리는 자신이 가진 힘보다는 공동체와의 연대와 결속을 통해 싸웠고, 또 공동체를 위해 승리했다. (잘 알다시피 해리 포터의 작가는 J. K. 롤링, 여성이다.)
어라? 해리 포터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예전부터 세계적으로 흥행한 작품 아니냐고? 내 생각엔 바로 여기에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사실 우리는 테토 스토리건 에겐 스토리건 영웅 서사를 그냥 좋아한다. 둘 모두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우리는 그것을 누려왔다. 스스로 자기 세계를 좁히지 말자.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 서사의 구조와 형태, 재미 요소를 좀더 속속들이 알아보자."
영웅 서사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지평과 카테고리를 이전보다 넓혀준다. 거기다 이야기에 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드는 방법도 안내한다. 스토리의 소비자에게도 재미있겠지만 스토리의 생산자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간만에 만나는 매력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