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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보는 서양사 ㅣ 만화라서 더 재밌는 역사 이야기 1
살라흐 앗 딘 지음, 압둘와헤구루 그림 / 부커 / 2022년 11월
평점 :
**일러두기 : 이 글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는 작업물 퀄리티의 우열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서술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나는 아마추어리즘을 사랑한다. 아마추어의 작업물에는 이른바 '클라이언트'를 의식한 자가검열이나 퀄리티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 퀄리티의 낮고 높음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얘기다. 원하는 걸 만들면 되고, 내킬 때 만들면 되며, 즐겁게 만들면 된다. 프로는 일견 멀끔해 보여도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듯한 결과물을 낳을 때가 종종 있다. <전쟁으로 보는 서양사>는 아마추어의 즐거움과 신선함, 그리고 한계를 담은 작업물이다.
나는 "설명해야 하는 드립은 실패한 드립"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른바 '드립'을 칠 때는 상정한 독자가 그 의도와 개그코드를 이해할 배경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는지를 고려해야한다는 뜻이다. 이 만화는 역사적 에피소드를 쉽고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동력으로 밈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애초 이 만화가 상정한 독자는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였다. 독자가 밈을 익숙하게 활용하는 주체들인 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 없이 적재적소에 드립을 배치해 놓고 있다. 아는 만큼 재미도 보장된다. 상당한 두께의 책을 읽는 동안 피식피식하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이 출판물로 넘어온다면, 밈의 적극적인 활용은 한편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출판물은 전 연령대의 접근성이 높아지는 만큼 밈에 대한 배경지식의 편차가 큰 '보편적 독자'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세계대전만화>가 앞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굽시니스트는 당시 작품 속 서술과 개그에 일본 서브컬쳐의 코드를 아주 많이 사용했다. 서브컬쳐에 일정 이상 이해도가 있다고 자부했는데도 나는 드립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재미는 반감됐다. 종이책으로 출간된 <본격 2차대전>만화에는 드립을 이해시키기 위한 주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굽시니스트는 시사잡지로 넘어와 기성 작가가 된 뒤로부터는 좀 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활용해 웃음을 끌어내고 있다.
밈을 서술의 주재료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도 갖고 있다. 심영물과 같은 지극히 예외를 제외하고 밈은 수명이 짧은 편이다. 몇 년만 지나도 독자들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개그인지 알기 어렵게 된다. 기성 작가들이 밈을 양념으로만 쓸 뿐 주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다.
<전쟁으로 보는 서양사>라는 거창한 제목은 붙었으되 서양사 전반을 살피기에는 내용도 부족하다. 십자군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여러 꼭지를 할애한 반면 30년 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굵직한 사건은 아예 생략됐다. 작가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크게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사건의 장면장면을 파악할 순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이나 미묘하게 얽힌 사정은 이야기의 선명성을 위해 생략됐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도 그렇다. 정말 서양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재미가 덜한)학습만화나 전문 서적을 찾아보아야 하고, 기본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포인트를 쏙쏙 박아넣는 역할은 기대할 수 있겠다.
사실 애초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생각해 보면 위에 언급한 한계들은 일말의 단점조차 될 수 없는 요소다. 작가가 관심사를 자유롭게 표현한 걸 독자는 그냥 구경하고 함께 즐길 뿐이었으니까. 난 이 작품이 계속 연재되길 바라고 기다린다. 위의 모진 말들은 어디까지나 '저 제목으로',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 되었을 때의 한계와 우려를 지적한 것임을 밝힌다. 그래서 "이 돈을 주고 살만한 퀄리티가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조금 고민하다 "음...그래도 한 번 볼만한 가치는 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