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진의 《파친코》나 천명관의 《고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거대한 서사적 스케일은 물론이고,눈을 뗄수없는 재미와 쉽지 않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렇다.읽는 동안 다른 게 끼어들 틈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힘.소설 속 세상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소설. 한마디로 더할나위없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유일한 진입 장벽은 역설적이게도 '제목'일지 모른다. 제목이 주는 다소 무거운 선입견을 넘어 일단 첫페이지를 열고 읽으면 바로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것이다.소설은 작가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 속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했다. 빛이 바랜 흑백 사진 속, 양복을 차려입은 분이 아버지이고,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은 끝내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지만, 뒷면에 쓰여진 "일생을 변치 말자는 우리"라는 문장과 더불어 바로 그 공백이 작품의 출발점이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크게 세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축은 김지량과 박창익이다. 오사카 항만청 주사로 일하며 현실 감각을 잃지 않는 박창익과, 금융조합에서 실력을 쌓으며 기회를 엿보는 김지량은 식민지 말기의 혼란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다. 그러나 지량의 내면에는 숙부 김항섭의 궁성 폭탄 투척 사건이라는 기억이 깊이 새겨져 있다. 두 번째 축은 엄순임과 오오모리 소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위협받던 순임은 언니 정임의 대학 동기였던 오오모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세 번째 축은 엄정임과 후지이 마키다. 독립운동 조직 흑단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정임은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연인 후지이 마키와의 관계는 물리적으로 단절되지만, 서사 속에서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여러 인물이 교차하며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서로 병렬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물고 이어지며 각 인물의 관계는 퍼즐의 흩어진 조각처럼 보이다가 어느순간 촘촘하게 맞물리며 연결된다. 사건과 관계가 교차하며 서사는 점차 밀도를 더한다. 일상의 소음,혹은 달궈진 더위 속에서 잠시 벗어나고플때 소설 해방전을 펼쳐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