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18 - 개혁의 사회심리학
강준만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1.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멈추고 다시 출발할 때 승객은 손잡이를 힘껏 붙잡아야 한다. 만약 힘껏 붙잡지 않으면 관성 때문에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버스가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나 버스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는 것은 아니다. 승객 대부분이 버스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지 않았다면 보통의 운전기사도 난폭운전사로 낙인 찍히게 된다. 물론 승객 대부분이 버스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았음에도 넘어졌다면 그것은 난폭운행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또는 버스가 급작스럽게 출발함으로써 승객이 미처 대처하지 못해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버스의 움직임에 대한 승객의 대비는 안전운행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개혁은 관성을 극복할 만큼의 일상적 의지가 필요하다. 마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스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는 것처럼. 너무 빠른 속도로 개혁을 추진하거나 개혁에 대한 홍보가 부족하다면 국민은 혼란을 겪게 되고 가능한한 과거의 관성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개혁의 성패는 국민의 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일상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개혁은 제도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인 면까지 파급되어야 한다. 일상을 변화시키지 않는 개혁은 결국 개악으로 종결되고 만다. 이 시점에서 개혁의 사회심리학을 파헤치는 것은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2.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전 국민의 여론은 의약분업 찬성이었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국민들은 현 정부의 최대실정으로 의약분업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이 의료개혁을 의료개악으로 만들었나?

그것은 의약분업의 명분이 국민의 불편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물론 의사에게 있다.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바로는 어느 의사도 의약분업을 불편해 하는 환자에게 의약분업의 명분, 즉 불편하더라도 약물 오남용의 감소를 위해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각인시켜 준 적이 없다. 오히려 불편의 모든 책임을 의약분업을 강행한 정부에 떠넘기기에 바빴다. 결국 국민들은 언론 등을 통해 의약분업의 취지에 공감했더라도 병원과 약국을 오가는 동안 어느새 의약분업의 취지에 공감했던 사실을 잊고 지금 겪고 있는 불편에 짜증을 내며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을 정부에게 돌리게 된다.

의약분업에 동참하고자 하는 국민의 일상적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정부는 결국 의료개악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대통령이 정책실패를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발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언론사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개혁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러나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족벌언론과 야당의 드센 반격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들의 일상적 변화를 얼마만큼 이루어낼 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는 언론개혁을 바라고 있지만 과연 족벌신문의 그 많은 독자들이 과감하게 신문구독을 중단할 수 있을까?

결국 언론개혁의 성패는 국민의 일상적 의지에 달려있는 셈이다. 족벌언론의 시장 장악력이 한 치도 줄어들지 않는다면 족벌언론과 야당의 반격은 탄력을 받을 것이며 언론개혁은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언론개혁을 향한 국민의 일상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철저한 세무조사와 더 전면적인 정보공개와 더 강력한 정간법 개정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다시 한번 의약분업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원한다면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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