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황종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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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중편 소설집 [감정의 혼란]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이다. 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는고 하니, 여주인공의 양가적 감정 즉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과 젊은 청년을 향한 여성으로서의 욕망, 이 양가적 욕망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을 마냥 성녀 마리아로만 그리지는 않는, 그렇다고 해서 ‘남미새’로 추락시키지는 않는 혼종의 지점들을 끝까지 갖고 간다. 읽으면서 계속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어’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오는 신묘한 심리 소설이다. 내가 느끼기에 초-리얼리즘 소설. 초현실주의라는 말이 아니라 극강의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뜻.


소설은 1인칭 화자(관찰자, 성별은 남)에 의해 진행된다. 배경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작은 여관이고 공간의 특성상 여러 군상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곳이다. ‘아주 매력적이지만 (내 판단으로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남자’ 두 명이 나오는데, 첫 번째 남자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두 번째 남자’를 소환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다. 첫 번째 남자는 츠바이크의 묘사에 따르면, ‘조심스럽고 우아한 태도에다 무엇보다 보기 드물게 호감을 주는 상큼한 용모’의 청년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늦저녁에는 호텔 여비서와 침침한 사무실에서 지나칠 만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다. 그날 밤 이 절대호감의 청년은 야반도주를 하는데, 그 비서와 함께는 아니고. 새로운 인물인 (12살, 13살 두 딸을 두고 있는) ‘곱고 여리고 더없이 얌전한’ 앙리에트 부인과 함께. 한마디로 33살가량의 몸가짐 단정한 부인이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한 시간 동안 커피를 함께 마셨을 뿐인 젊은 청년과 (남편과 애들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이때부터 여관 투숙객들의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시작되는데, 오래전부터 두 사람이 내연관계였다느니, 원래 타고난 매춘부였다느니. 그래서 우리의 성인지 감수성 높고 공감능력 만렙인 화자가 등판하여, ‘여성이 살면서 이따금 자신의 의지나 지식 너머의 신비스러운 힘에 내맡겨질 때가 있는데 그 뻔한 사실을 딱 잡아떼는 것은 자신의 본능, 인간 천성의 마성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다... 오히려 여성이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본능에 따르는 편이 더 솔직하다’고 설파하며 앙리에트 부인을 열정적으로 쉴드쳐주게 된다. 이를 눈여겨본 인물이 있으니,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어느 여인’이다. 백발의 기품 있는 영국인 노부인으로, 귀족적이고 조심스러운 자태와 경이로운 평정심과 침착성이 배어나는 인물이다.


이 우아한 노부인은 67년의 삶 가운데 딱 24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화자에게 들려준다. 노부인은 42살까지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는데, 부유한 지주의 딸로 태어나 명문가 자제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큰 걱정 없이 살아간다. 40살 되던 해에 남편이 급사하고 과부가 되는데, 남편을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 혼자 여행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42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 문제의 ‘스물네 시간’을 맞게 되는데, 몬테카를로 카지노에서 ‘도박보다 흥분되고 오랫동안 운명을 혼란에 빠뜨린’ 그 남자와의 시간을 말이다. 남주인공은 그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있던 젊은 청년으로, 여주인공이 이 청년에게 매료된 이유는, 츠바이크의 묘사에 따르면 도박에 미친 ‘ 손의 열정’ 때문이다. ‘오른손과 왼손이, 악착같은 두 짐승처럼 서로 꽉 물고 늘어진 채, 극도로 긴장하여 깍지 끼고 서로 움켜쥐어, 호두가 깨질 때 나듯이 손마디를 우두둑거리는’ 그 아름다운 손에 매료된다. 미친 듯 열정을 표출하는 그 모습에. 아마도 평생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살았고, 특히나 과부가 된 이후 여주인공은 지나칠 정도로 정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기에(상복을 계속 입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정반대되는 역동적인 삶, ‘손의 움직임으로’ 대표되는 그 삶에 매혹됐을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츠바이크는 이것을 ‘설명’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손의 ‘묘사’로 풀어낸다.


아무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안 되려고 그랬는지, 남주인공은 판돈을 모두 잃게 되고 낯선 이의 절망에 마음이 동하여 여주인공은 그를 뒤쫓아간다. 하늘이 뚫린 듯 퍼붓는 억수비 속에서 길가 벤치에 널부러져 있는, 나이는 스물네 살 정도 돼보이는 이 청년을, 여주인공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아무 괜찮은 호텔로 데려간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여주인공의 욕망은 세인(마부와 청년)들로부터 단단히 오해를 사게 되고. 오해를 사는지 안 사는지 낌새도 못 차릴 정도로 여주인공은 초-순수한 구원의 신이었다.

그리고 얼레벌레 그날 밤 청년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어버버한 상황-자세한 묘사는 본문 참조) 한 줄로 요약하면,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출발해서 초단기 비극적 연애에 빠지게 된다는 것. 하지만 이 때 하룻밤 같이 잤다고 사랑에 풍덩 빠진 것은 절대 아니라고 여주인공은 말한다. 암만~


다음날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자는 청년을 보며, 여주인공은 기적과 신성으로 축복받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녀는 마침내 상복을 벗고 밝은색 옷으로 갈아입으며 이 청년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구원을 마무리 짓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청년이 성당을 지나갈 때 공손하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것으로 봐서, 그 깊은 신심, 종교에 대한 경외감으로 미루어 보건대, 인류구원 프로젝트는 분명코 성공할 것만 같았는데.

패착은, 청년에게 집으로 돌아갈 여비를 미리 주었다는 것.^^;; (잠시 후 청년은 이 돈을 갖고 또 도박을 할 거라는 것.) 그리고 이때 여주인공은 청년이 자신을 성녀처럼 숭배할 뿐 여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데서 깊은 실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독자에게 이 감정은 사실 그렇게 다이나믹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이유는 첫째, 여주인공이 이런 감정을 갖게 되는 계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둘째 이후 훨씬 더 무궁무진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감정 정도는 새발의 피로 느껴지는 효과가.^^; 그럼에도 이런 감정이 없었다면 너무 서사가 ‘여성-모성-성녀’로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소설이 너무 구태해지니까. 남자사람-작가임에도 이 정도의 설정을 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츠바이크에게 경배를! (과.정.상.으로는 좀 미심쩍은데. 하룻밤을 같이 했으니 사랑에 빠졌겠거니 하는 하찮고 저열한(50원짜리) 의도도 있을지 모름. 하지만 내 정신건강을 위해 전자로 밀어부치련다.^^;)

암튼 청년은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뒤로 하고, 카지노로 냅다 달려가서 도박에 제대로 빠지고. 그리고 이를 뜯어말리는 여주인공에게 ‘부인만 있으면 잃는다며, 어서 꺼지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카지노에 모인 사람들에게 제대로 웃음거리가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현장을 시누이가 목격하게 되고. 그래서 여주인공은 정말 너덜너덜해진 채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필생의 인류구원 프로젝트는 무산된다.


이런 결론으로 인해, 혹시 여주인공의 일탈(?)에 대한 처벌의 서사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 있겠지만, 우리의 화자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의를 꼭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도 이것을 느꼈다는 것. 중요한 것은 화자의 인정이 아니다. 여주인공이 이 고백을 다 마친 후 화자가 앙리에트 부인을 쉴드쳐줄 때,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표면적으로는 화자의 인정으로 여주인공이 스스로의 행위(가치)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박-개쓰레기(?)를 구원할 생각을 할 정도로 이미 그녀는 강인한(kind라 쓰고 강인하다고 읽는다, 다정함은 무기잖아) 사람이었다는 것을, 누구의 인정도 필요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소설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남자 사람이, 20세기 초에 이렇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여성의 양가적 욕망을 ‘우아하지 않은 방식’으로 썼다는 지점이 매우 놀랍고. 겉으로 봤을 때는 그냥 싸구려 대중소설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 ‘싸구려-대중’이 갖는 어메이징한 전복적 힘을 항상 숭배하는지라.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장르를 보라!)

암튼 이런 놀라운 서사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츠바이크가 갖고 있는 놀라운 감수성 때문일 것이고.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츠바이크가 이성애자일 수는 없을 것이고.^^

암튼 앉은 자리에서, 교감신경 끝 간 데 없이 항진되며, 한 호흡에 읽게 되는 소설. 이런 속도감을 온전히 표현한 역자에게도 경배를! 한글로 된 소설 <동백꽃> <봄봄>을 읽을 때보다 더 절절하게 공감되는 신묘한 번역.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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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
벤 싱어 지음, 이위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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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으로 성실한 이론서. 번역도 훌륭함. 소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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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적 상상력 - 발자크, 헨리 제임스, 멜로드라마, 그리고 과잉의 양식
피터 브룩스 지음, 이승희.이혜령,최승연 옮김 / 소명출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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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챕터는 번역이 너무 안 좋음.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대입하면서 읽어도 안 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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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오늘의 커피에 최적화 돼서, 제 입맛에는 산미가 좀 느껴져요. 저울 사서 원두/물 무게 정확히 재서 다시 도전해 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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