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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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한 가지는 저자의 메시지를 생각하며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집중해서 보는 방법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각각의 개별 에피소드를 파고들어 그 안에서 철학적 의미를 생각하며 반복 읽기에요.

 

주 당 한 권 정도를 읽는 정도의 수준이지만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많이 발췌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은 책이었어요. 특히 공항에서의 여행에 관한 강연은 더 많은 생각을 양산하게 했어요. 정주해 있지 않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여러 에피소드들 안에서 단지 물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담아내어 말하고 있어요. 보통의 소설의 경우 한 가지 관점에서, 한 가지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마련인데 이 책은 1인칭 시점 외에 제 3의 입을 빌려 촘촘하게 상상인지 사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긴밀한 형태로 쓰여 있어서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이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방랑자들 중 한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요.

 

책에는 정말 많은 해부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이 나오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반복적으로 묘사한 것에는 작가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작가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글로 전달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더 재미있고 알차게 읽는 방법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플라스티네이션 기술이란 편지글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시신을 구경꾼들의 시선이 아닌 가족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와 다음 생을 이어가길 바라는 딸의 소망을 거스르는 행위는 아니었을까요? 단지 물리적으로만 포름알데히드의 힘을 빌어 영구보존 되어야만 방랑하지 않고 정착하는 것이 아님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건 아니었을까요?

 

300년 동안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봉투에 빗대어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가벼운 형태를 권장한다는 편재성을 언급한 부분도 방랑자의 시선에서 우리 육신을 역설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각 에피소드들이 끊어진 것 같으면서도 이후에 또 나와 이어지면 그렇게 더 재밌고 반가울 수가 없더라구요. 보통의 소설은 이보다 훨씬 적은 수의 에피소드로 각 이야기가 연속해서 이어지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요. 하지만 이 책은 어떻게 보면 뒤죽박죽 섞어 놓은 것처럼 흩어져 있어요. 그런 구성 또한 우리 삶의 모습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교수라고 해서 교수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가해서는 재혼한 아내 카렌의 열혈 뒷바라지를 받아야 하는, 내 안의 여러 조각들을 연속된 삶의 형태로 이어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또한 어떻게 보면 하나인 것 같은 내 삶 안에서도 여러 모습으로 방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연관성 없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 속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스쳐 지나간다는 거예요. 유람선 <포세이돈>, 고래, 박제 등 우연히 어쩌면 마주쳤을 지도 모르는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구성 덕분에 더 책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요.

 

우리가 익숙한 것에만 정주하며 이동하려 하지 않고 변화하려 하지 않으면 결국에 모든 것은 부패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방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 - p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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