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의 서평 인용이며,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자료를 남겨드립니다.
서평에 앞서 이 자료집 간행을 기획하고 재원을 마련한 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서울대 수의과대학 그리고 동창 여러 분들에게 그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한다. 또 이 자료집 간행을 위해 자료수집과 자료의 번역 그리고 편집 편찬에 헌신하신 드러나지 않은 여러 분들께도 감사한다.
서평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石虎弼)에 관한 자료집이다. 세계적 수의학자로 이름난 스코필드는 일제 강점기에는 의료선교사로 한국에서 봉사했고 해방 후에는 한국에 와서 일생을 마감한 캐나다 인이다. 그가 선교사(1916-1920)로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교수로 봉사하고 있을 때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현장을 답사하며 사진과 기록으로 증언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이같은 활동으로 그는 3.1독립운동 ‘제 34인’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또 그는 192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해 추방되다시피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삶에서 한국을 잊지 않았고 1958년 그가 그리던 해방독립된 대한민국에 와서 후진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그 뼈를 이곳에 묻었다. 그의 81년간의 생애에서 한국에서의 삶이 16년에 불과했지만 65년간을 영국과 캐나다에서 산 것 못지 않게 한국에서의 삶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 동안 전기와 논문 등을 통해 스코필드의 생애와 활동, 삶과 사상이 소개되었다. 또 그가 직접 신문 잡지에 쓴 기록들도 접근이 전혀 불가능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는 그런 자료에 접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료들이 대부분 흩어져 있어서 일반 독자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자료들은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면 찾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이번에 스코필드기념사업회에서는 이 방면의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모아 이 자료집을 간행했다. 간행의 목적은 스코필드에 관심있는 후진들에게 그 원자료에 접근케 함으로 스코필드를 좀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그가 갔던 길에 동행하도록 안내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편집, 간행된 스코필드 자료집은 크게 4개의 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첫째 장은 일제강점기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및 기고문, 둘째 장은 해방 이후 스코필드 박사의 기고문, 셋째 장은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 넷째 장은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연구 논문이다. 부록에는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린 글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 장과 둘째 장은 스코필드 자신이 쓴 것으로 그 자신의 한국관과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셋째 장은 스코필드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그를 회상하면서 쓴 글이거나, 넷째 장은 연구자들이 스코필드의 전반적 생애와 신앙, 그리고 한국사회와 관련된 그의 공헌 등에 대해서 쓴 논문들이다.
먼저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자료들을, 이 자료집 편찬에 참여한 김승태 박사의 ‘해제’-<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 자료>-를 참고로 하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장은 <일제 강점기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및 기고문>이다. 여기에는, “스코필드 박사의 일제 만행 보고서” 2편과 “스코필드 박사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영자 신문 기고문” 14편, 그리고 “스코필드 박사의 국내 신문 기고문” 4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스코필드 박사가 일제 강점기 때에 쓴 20편의 글이 첫째 장에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이 중 “스코필드 박사의 일제 만행 보고서”에 실린 두 편의 글은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일본군의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과 그 인근 수촌리의 방화 학살 만행을 직접 답사, 목격하고 폭로한 글이다. 두편 중 한편은 4월 18일 스코필드가 직접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을 답사하고 기록,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이고, 다른 한편은 제암리를 답사한 그 날 오후 제암리 근처의 수촌리를 답사, 방화 학살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장로회 기관지인 Presbyterian Witness (1919. 7. 26)에 기고한 글이다. 특히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목사에게 보내진 제암리 관련 보고서는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1919년 7월에 발행한『한국의 상황』(The Korea Situation)에 게재되어 일본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영자 신문 기고문”에 포함된 14편은 “1919년-1920년 사이에 스코필드 박사가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된 글로브(The Globe)를 비롯한 몇 개 영자 신문 잡지들에 기고한” 기고문들이다. 일제 강점하에 있는 한국인들의 처지를 적극 변호하려고 했던 스코필드는 언론을 적극 활용했다. 특히 일본에서 간행되던 ‘재팬 애드버타이저’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1920년 3월 14일자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게재된 <한국에서의 개혁 III - 실패의 원인>에서는 일본이 선전하고 있는 ‘개혁’에 대해 한국인들은 ‘기만당했다’고 믿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수감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 등을 지적하고 경찰제도의 개혁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글 중 일부는 인터뷰 기사도 있고 또 일부는 당시 동아일보 등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국내 신문 기고문” 4편은 모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동아일보 창간호(1920.4.1)에 기고된 “조선의 발전 요결”을 비롯하여 1926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쓴 “조선의 친구여”(1926.9.17-19), 1926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보낸 “나의 경애하는 조선의 형제여-스코필드박사 서한”(1927.1.5) 그리고 1931년 크리스마스 때에 보낸 “경애하는 조선형제에게”(1931.12.26) 등의 글에서 그는 스스로 캐나다인이라기보다는 조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한편 조선을 향한 苦言도 기탄없이 언급했다. 즉 교육, 산업을 권고하는 한편 근검 절약과 도덕 숭상을 강조했다.
둘째 장은 <해방 이후 스코필드 박사의 기고문>이다. 스코필드는 캐나다에서 은퇴한 후 1958년 한국에 다시 와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한국에서 영주할 계획으로 캐나다에 가서 신변을 정리하고 9월에 돌아왔다. 그 무렵부터 그는 뼈를 묻을 한국을 위해 건의하고 충고하고 따끔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9년부터 신문 등에 기고하기 시작, 1970년 4월 돌아갈 때까지 남긴 그의 글에는 3․1운동을 회고하는 글 6편을 포함하여 지금 읽어도 한국 사회를 향한 감동적인 내용들이 있다. 그는 4.19혁명을 ‘3.1독립운동의 영웅적 정신의 재현’으로 높이 평가했고, 독재적이고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여 깨끗하고 진실한 민주주의적 정부를 수립하려는 결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5.16을 ‘밑바닥까지 부패’한 사이비 민주주의에 대치되는 ‘일루의 희망’으로 또 ‘정직한 군인이 부정직한 정치인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신뢰에 실망하는 날에는 만사는 끝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스코필드는 1960년대 후반에 6번에 걸쳐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에 “현대사조(Thoughts of The Times)”라는 칼럼을 집필하여 종교와 도덕, 과학과 종교, 무신론적 인본주의, 한국의 추석과 영국의 수확제, 예수의 죽음과 어린 초등학생의 자살 등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둘째 장 마지막에는 “박정희 신임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이 있는데 언론에 기고한 글은 아니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기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이 기도문은 1963년 12월 17일 민정 이양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 취임에 앞서 12월 15일 주일 서울 용산에 있던 군인교회에서 열린 취임축하예배에 행한 것으로 박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부탁을 받고 드린 기도문이다. 이 장에서 보이는 그의 글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나름대로 찾아볼 수 있다.
셋째 장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에는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의 글” 7편이 실려있다. ‘석호필 박사의 최후’(전택부 백난영)를 비롯하여 ‘고 스코필드 박사 간병 365일’(태신자), ‘1919년 3․1운동과 선교사들’(번역, 어니스트 피셔), ‘구두 밑창에 3.1운동 사진 필름 숨겨 臨政에 전달-3.1운동과 나와 스코필드 박사’(정환범), ‘스코필드: 조선을 치유한 의사’(정운찬),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비범한 수의학자’(번역, 더글라스 C. 메이플스던), 그리고 ‘국립묘지에 잠든 벽안의 애국지사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이삼열)의 7편이다. 이런 증언을 통해, 부활신앙을 가지고 생의 끝날까지 철저한 자기관리와 검소한 생활을 잊지 않았던 스코필드의 신앙인격과 3.1운동 때에 스코필드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에 은신처를 제공해 준 행위, 그리고 3․1운동 때 독립시위를 하다가 참살당한 한국인들의 사진 필름 50여 매를 상해로 가지고 가서 각국에 선전하라고 당부한 내용도 밝히고 있다. 더글라스 C. 메이플스던의 글은 2005년 캐나다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간행된 단행본 스코필드 전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스코필드 박사의 비범한 수의학자․병리학자로서의 업적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스코필드 박사의 영어 성경 공부반에 참여하여 직접 지도를 받았던 정운찬 이삼열의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가 있는데, 이삼열의 글이 스코필드의 검소한 삶을 증언하는데 비해서 스코필드의 생애 전체를 조명한 정운찬의 글은 『한국사시민강좌』에서 한국에 와서 활동한 외국인을 소개하는 특집에 소개된 것이어서 독자들이 스코필드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증언들은 스코필드의 삶과 생각, 신앙과 학문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3.1독립운동과 관련된 두 증언은 스코필드 자신을 통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이 셋째 장은 앞의 두 장이 스코필드가 주관적으로 자기를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그와 교제를 나눈 이들이 스코필드를 증언하는 것이어서 객관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넷째 장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는 스코필드 박사에 관한 연구 논문 4편이 실려 있다. 스코필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 논문으로 도레타 모티모어가 쓴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인의 민족의식’(원문: Dr. Frank W. Schofield and the Korean National Consciousness)이 있다. 이는 서미시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1977년에 펴낸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반응: 1910-1945년 식민 시기』(Korea’s Response To Japan: The Colonial Period 1910-1945)라는 논문집에 게재되어 있다. 이 논문이 작성될 때만 해도 스코필드가 단행본으로 발간하려고 준비했던, 3.1독립운동과 관련된 <The Unquenchable Fire, 끌 수 없는 불꽃>이 직접 인용되고 있었다.
남태욱이 쓴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의 영성’은, 필자의 설명에 의하면, 캐나다 토론토의 스코필드 박사 기념사업단에서 2007년 12월 1일 토론토 동물원에 기공한 스코필드 박사 동상과 추모공원과 더불어 스코필드 박사를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논문은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 수의과학연구소에서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계승 발전하기 위해 개최하는 스코필드 박사 추모 심포지움에서 2008년 4월 발표되었고, 같은 해『종교연구』제53집에 실렸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스코필드의 영성을 ‘기도의 영성’과 ‘배려의 영성’으로 나누고 양자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면서 스코필드에게서는 양자가 분리되지 않고 긴밀한 통전성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바바라 리걸트와 존 프레스콧이 공저한 “‘주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 독립운동”(원문: 'The Arch Agitator:' Dr. rank W. Scofield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은 “『캐나다 수의학지』(Canadian Veterinary Journal) Vol 50, 2009년 8월호에”게재된 것이다. 이 논문은 캐나다 선교부 문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두 논문과는 구별되며 사료적인 뒷받침이 탄탄한 논문으로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일본 정부가 1919년 12월 스코필드를 시위 ‘주동자’(The Arch Agitator)로 지목한 데에 주목하고, 나아가 당시 한국에서 정치적 중립을 옹호하는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의 반식민주의적 입장이 조국 영국(캐나다)가 취하고 있는 식민주의에까지 미치고 있었음도 밝혔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래 스코필드를 ‘추방’하기 위한 일본의 압력이 세브란스를 통해서만 나타난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 논문에서는 캐나다 선교부의 태도변화에서도 감지된다는 점을 밝힘으로 캐나다 선교부는 물론 캐나다 정부를 통해서도 스코필드 퇴출 압력이 행사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스코필드가 귀국한 뒤에도 한 동안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도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만열이 쓴 ‘스코필드 박사의 의료(교육)·사회 선교와 3.1 독립 운동’은 2010년 4월 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서울대 수의과대학이 주최한 ‘스코필드 서거 제40주기 기념식에서 행한 강연을 보완하여,『한국근현대사연구』제57집(2011년 여름호)에 발표한 것이다. 이 논문은 스코필드가 내한한 1916년 11월부터 1920년 4월까지의 그의 활동을 의료(교육)선교와 사회선교라는 시각에서 정리한 것으로 특히 그의 제암리․수촌리 만행 현장 방문 조사와 식민통치 비판 및 공창폐지운동 등에 대해서 가능한 자료를 섭렵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 자료집을 통해서 스코필드의 한국 관련 자료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간행된 이장락의 스코필드 관련 저술들과, 여러 사람들이 신문 잡지에 소개한 글을 통해서 스코필드에 대해서 웬만큼 알고 있지만, 이 자료집에 게재된 내용들은 역사학적으로 말한다면 스코필드가 직접 썼거나 그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남긴 회상들이어서 1차자료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논문들도 이런 1차자료에 근거하여 천착된 연구들이어서 신뢰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이 자료집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스코필드는, 김승태가 이 책 해설 말미에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신념을 가진 실천적인 사람이었고, 약자를 배려하고 격려하고 돕는 사랑의 사람이었으며, 약자의 편에서 거짓과 폭력과 부패와 차별이라고 하는 반인도적인 사회악과 싸운 용기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며, 검소하고 성실한 신앙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영성이 풍부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정직과 근면에 바탕한 성실인이었으며 그의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유모어를 잃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바탕 위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 점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다른 선교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식민치하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민중에게 다가가고 있었으며, 또 일제하에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방종하는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독립이 국권회복운동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성결운동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윤리적 각성운동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스코필드도 한 이간인 이상, 그에게 흠모할 만한 장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넘지 못할 인간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평자의 생각에는 그가 한국에서 보낸 만년의 때에 그의 판단력에 아쉬움 같은 것이 남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것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5.16 군사쿠테타’에 대한 입장이 평소 그가 보였던 민주주의적인 신념과 일치되는 것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5.16 군사쿠테타’를 그 전해에 있었던 ‘4.19혁명’과 혁명이라는 어휘 속에서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舊惡을 一掃하겠다는 군인들의 주장을 과신한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이 점은 그가 1963년 1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앞서 모인 용산 소재 군인교회의 축하기도에서도 ‘부패한 모든 것을 증오함에 감사’한다는 데서도 느껴지고 있는 바, 스코필드는 젊은 군인들의 부패척결의 약속에는 감동했으나 군사정권의 반인권적 반민주적인 작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그가 박정희의 실정과 한계를 보았을 뒷날까지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이 박정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이 그가 만년을 맞아 젊을 때와 같은 판단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성품에서 때때로 보이는 사고의 유연성이 한계에 이르러서 그런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런 한편 평자는 스코필드가 1970년에 타계하여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 유신독재를 경험한 우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5.16과 박정희를 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도 배제하지는 않겠다.
끝으로 <스코필드 박사 자료집>의 자료집으로서의 외연의 확장과 관련하여 몇 마디 첨언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번에 출판된 이 자료집은 그 동안 접근하기 쉽지 않은 자료들을 한 군데 모아 주었기 때문에 이 자료집을 통해 스코필드 박사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평자는 여기에 좀 더 욕심을 보태고 싶다. 이번에 간행된 자료집에 게재된 것은 스코필드 박사의 생애와 관련해서 본다면 한국 관련 자료들을 주로 모았기 때문에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일종의 ‘選集’에 해당될 것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외연을 확대하고 그의 삶의 동선을 따라 가 보면 이 ‘자료집’에 수록된 내용 외에 더 많은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자료를 발굴하여 제공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전인적인 이해와 연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는 한국과 관련 없는 자료들도 다수 포함될 것이다. 한국 관련 연구를 한다 하더라도 그 앞뒤 시기의 자료들도 한국 관련 연구에 필요하다. 직접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가 아닌 것을 수집하는 것은 한국측 기념사업회의 사업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아서 언급하는 데에 조심스럽지만, 만약 캐나다에도 스코필드를 기념하는 기관이 있어서 그의 전 생애를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곳과 협력해서라도 한 인간 스코필드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자료를 모아 <全集> 형태의 자료집을 구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의 81년 생애에서 한국에서의 삶이 불과 16년에 불과하지만, 그가 3.1운동 제 34인으로 추앙받고 그의 시신이 애국인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가 평소 자신을 한국인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캐나다측보다는 한국의 스코필드기념사업회가 주동이 되어 그의 ‘全集’ 간행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자료를 더 모아 ‘全集’을 간행할 필요성이 있다면, 다음에 거론하는 것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1977년 도레타 모티모어(Doretha E.Mortimore)가 그의 논문을 쓸 때까지만 해도 캐나다 온타리오의 브레슬로의 조지 카디널(George I. Cardinal)이 소장했다는, 그러나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The Unquenchable Fire, 끌 수 없는 불꽃>을 더 조직적으로 발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당시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왔던 만큼 선교부 문서를 더 섭렵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이미 몇 몇 연구자들의 논문에 인용되고 있는 자료들이기도 하지만 좀 더 조직적으로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코필드가 매우 부지런한 선교사였던 만큼 그는 아마도 일기를 썼을지도 모르며, 선교부와 가족 친지들에게 많은 私信도 보냈을 것인데, 그의 일기와 편지들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 연구에서 일차 자료로서 본인이 私的으로 직접 쓴 일기와 편지만한 것이 없다. 또 그가 조선에서 일본을 비판했을 뿐아니라 일본에 가서도 정객들을 만나 ‘조선문제’와 ‘식민통치의 개선’에 대해서 논의했던 만큼 일제의 경찰 정보 계통에서도 그에 관한 비밀 자료들을 매우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의 재학시절의 자료와 그가 근무했던 세브란스와 캐나다의 대학, 그의 가정생활과 관련된 자료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집 형태의 자료집을 편찬하려면 그가 쓴 수의학 관련 전공 논문들과 칼럼들도 수집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한국 정부에서 건국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심의한 기록도 수집하고, 신문 잡지에 스코필드에 대해서 난 기사들과 사진자료들도 수집한다면 적어도 몇 권으로 된 <스코필드 전집>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으로 제 부족한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료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어 이 땅에 제 2. 제 3의 스코필드가 재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이 자료집 간행을 기획하고 애쓰신 여러 헌신자들에게 감사와 치하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4월 12일, 제 10회 스코필드 박사 기념식,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행한 <스코필드 박사 자료집>,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게는 비둘기처럼”의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