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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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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삶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수배중이거나 투옥 중이었으므로 늘 부재중이었다. 아버지의 동지들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함께였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동지였다. 그녀는 남편의 부재 속에서 옷을 고치거나 지으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족은 빛과 바람을 빼앗긴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어머니와 아이는 단칸셋방에서.빛은 잘 들어옵니까/바람은 불어옵니까/ (……) //언제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우리가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은. (진주, 267)”


빛과 바람을 빼앗긴 대신 가족이 얻은 것은 비밀과 가난과 불안이었다. 가난과 불안은 비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것과 아이의 것은 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밀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하는 것이었지만 아이의 비밀은 오직 혼자서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나눌 수 있었지만 아이의 세계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다. 학기 초 가정환경조사서에 적힌 항목을 발표하는 시간. 아이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진실이자 거짓이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아이들의 소란에 선생님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말한 뒤 그 사실을 잊는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불 꺼진 텅 빈 교실. 창밖에는 새들이 일제히 열을 지어 날아가고 있다. (……) 가장 느리고 어린 새 한 마리가 대열을 벗어나 날고 있다. 어린 새는, 무리로 합류하기 위해 서두른다.”(160) 어린 새는 그 후 몇 십 년 동안 그곳에 앉아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주기를, 자신이 그 비밀을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린 새에게는 비밀조차 적지 못하는 수첩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선물했으나 돌려받은 것이었다. 경찰에게 붙잡혔을 때 아버지가 한꺼번에 삼켜버릴”(93) 수 없는 수첩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돌려받은 수첩 안에 글자를 적고 또 적는다(94).” “한 번 놓치면 그 장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두렵기”(93) 때문에 문자 속에서 그 시간 그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날 때까지 적는다.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 수첩을 읽는다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울 것”(94)이므로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94).” 그래서 아이는 수첩을 숨길 상자를 만든다. 상자를 하나 만들고 두 개를 만든다. 세 개, 네 개, …… 아홉 개, 열 개를 만든다. 그렇게 꼭꼭 숨겨놓아도 마지막 상자는 언젠가는 열릴 것이고 수첩을 빼앗기기 전에 삼켜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때부터 그 수첩에는 어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96)이 적힌다. 아이가 불 꺼진 텅 빈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나오기까지, 눈 쌓인 나뭇가지에 멈춰 있던 어린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기까지, 비밀은 당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증거입니다”(87)라고 선언하듯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첩에도 적히지 못한 비밀은 마치 유령의 혼불처럼 아이의 몸속에 살아 있었다.


비로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시간은 멈춰 있었다. 적어도 딸에게는 그랬다. 아버지는 딸에게 공집합을 가르치지만 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세계에”(12) 있었다. 그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시간”(17)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이 끝나고 동지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갈 길을 찾을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개인적인 삶”(48)으로 내던져진다. 그는 이제부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평생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그는 집에 돌아왔어도 돌아온 적이 없다. 여전히 그날의 골목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딸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42)고 아버지는 여전히 뒷모습으로 말한다. 정권 교체 후 대법원이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선고하면서 잇따라 관련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왔지만 몇 년 간 달라진 것은 없다. 어느 날, 딸은 자신이 국민학교 때부터 쓰던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외국어 문장을 공부하던 한 남자의 뒷모습에서 아버지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172)는 것을 본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176)고 생각한다.모든 것이 사라져, 다시 돌이킬 수 없기 전에(176).”


딸은 어릴 적 수감된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도시, 진주를 다시 찾는다. 그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이동이다. 과거로의 여행. 딸의 미래는 아버지의 과거라는 역을 거쳐야만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여행은 아버지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딸의 현재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진주에서, 딸은 수감 중이던 아버지를 만난 날을 회상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고향이라는 단어를 생각”(207)한다. 그녀는 그곳을 다시 찾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그곳에 닿을 것임을, 닿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219)으면서도 교도소로 가는 버스에 타고 있는 그 순간에도, 버스에서 내려 정문 옆 접견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언제든 다시 발길을 돌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려 애쓴다. 결국 그곳에 닿을 것임을알았던 것처럼 그녀는 그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여행”(223)이었음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발견까지 예감하지는 못했다. 첫 번째 발견은 감옥이 있는 작은 도시”(213)로서 특별한 것 없는”(213) 곳으로서 진주를 보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발견은 시장 안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시가를 빠져나와 어느 동네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밥 먹으러 들어온나”(224) 하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에 숨차게 골목길을 달려 (……) 사라져가는 조그마한 여자아이”(224)를 본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수십 년 전 서울 외곽의 어느 동네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의 끝까지 눈을 감고도 달렸”(226). 더 이상 여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는 진주의 한 골목에서, 재개발로 하나둘씩 철거되는 집들 사이 마지막까지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남은 몇 가구 중 하나”(227)인 자신의 옛집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직도 부서져가는 집 안에 있을 여자아이가 급하게 벗어놓고 들어간 신발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비밀을 안겨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도시에서. 아이는 다시 달린다. 부서져가고 있지만 두려운 것이 있지만”(227) 그래도 최소한 달릴 수는 있다.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들은 이제 꿈속 운동회에서 달리지 않아도 된다. 아이는 어둠속에서도 눈을 뜨고 달릴 수 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아이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매일같이 깨어나고 있었다. 비로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빛과 바람과 목소리의 공간


당신 뒤에 딸도 받아쓰기를 했습니다”(123)라고, 어른이 된 아이는 쓴다. 어릴 적 살던 이모네 집까지 찾아와 감시하던 사복경찰. 어느새 가족처럼 익숙해진 그 남자”(148)이 순간 이 시간을 살아 이겨내기 위해 공부를 하는”(147) 아이의 등뒤에 서서 문장들을 불러준다아이는 경찰이 밉고 싫다. 공책을 덮자 다행히 개들이 짖고 사촌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남자는 돌아간다. 이것이 딸이 경험한 최초의 받아쓰기였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작가는 이것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고문과 회유와 협박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받아쓰기에 대항하는 경험으로 쓰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딸의 받아쓰기는 이 책의 원고를 쓰며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허깨비처럼” “유령처럼” “관성처럼”(279) 살고 있던 그녀 안의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그러한 삶을 거부하기 시작했(279) 그 사람은 진주로 가자고 한다. 진주에 다녀온 뒤로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글쓰기는 자기 안의 그 사람이 정신 나간 듯 시종 뭔가를 중얼거리는”(280) 목소리를 받아쓰는 일이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그 사람은 삼십여 년 넘는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꺼내고자 했다.”(280)


어떤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연결될 때, 그 목소리가 외부를 향해 발신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이야기,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외면할 수도 없었고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렵지만 더는 두려움에 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우연처럼 그 사람의 긴 이야기를 견뎌줄 조용한 장소”(280)가 작업실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나타나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려움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운동장“(280)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며 앞으로 나아가며 원고를 완성했다. 이로써 그녀는 다시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빛이 내려오는 공간을 갖게 됐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불어오고 자신의 목소리가 온전히 울린다. 빛은 시간의 일이고 바람은 공간의 일이며 소리는 시간과 공간의 협업으로 비로소 들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글이 가닿기 위해쓰였다고 말한다. 원고가 책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더 믿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도 했다. 이 글이 읽히고 있는 지금, 그녀의 믿음대로 읽는 사람의 수만큼 새로운 장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곳은 매우 개인적인 동시에 타자의 존재를 믿는 공간일 것이다. 나는 그 공간에 잠시 머물며 내가 걷는 길을 누군가 앞서 걸었다는 생각에 미치면 이상하게도 위로받는 마음이었고, 그 힘으로 견디며 조금씩 써나갈 수 있”(293)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내 안에도 약간은 정신 나간 듯이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으므로.


진주를 읽기 전 나는 이미 파편이 되어버린 과거의 흔적을 하나로 꿰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의 이야기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럴 때마다 연결되었다 믿었던 내부의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다시 그 목소리가 찾아와주기를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다시 그가 찾아오면 또 같은 잘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과거의 기억은 그녀의 말처럼 도처에 있기에”(17) 아예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가 자신이 더듬은 기억의 흔적을 책에 그대로 싣기로 한 결정은 나에게 놀라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아버지들이 썼을 대자보, 가정환경조사서의 항목들, 분신한 어느 40대 남자에 관한 인터뷰 녹취록, 어린 그녀가 사인펜으로 그린 파리행 열차티켓과 어머니와 함께 그렸을 하얀 종이 위 손과 발의 윤곽. 어쩌면 수집물로 남았을 흔적들을 역사의 기록물로 확고히 위치시킨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진주속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만의 불가능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리뷰로나마 작은 응답을 보내고 싶었다. 나 역시 언젠가 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닿으리라 믿으며.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강도로 누군가 듣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강도로 상대가 말하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화자는 청자를 향해 말함으로써, 청자는 화자를 향해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나타나게 한다. 은 그렇게 생겨나며 그때 표현은 표현으로서 성립된다.”(287~288)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294)

 


*** 


전동차 안 출입문 가까이

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다


머리 위

쏟아지는 오렌지의 빛깔


덜컹,

시간이 출발해

아득한

철교 아래로


흐른다

골목들로

단칸방으로

교회로

감옥과

테이블 위와

바다로


바다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파도가 묻는다.


아버지.

나의 피는

검게 수직으로 고동칩니까.”


뒷모습은 여전히 말이 없고


창밖

가지 위에서

상공으로

흰 새는 날아오른다


태초의 날갯짓처럼

태초의 소리처럼


나뭇가지에 쌓인 눈 떨어지면

새들은 농담처럼 지저귀고

아버지는 뒤돌아 휘파람을 분다


그사이

새시 문 안의 어두운 방들

어머니

어머니들


걷는 발이 지나는 골목마다

달리는 발이 지나는 길 위에

자라나는 손발이 뻗어나가는 순간에


기도하는 손과

밥을 짓는 손과

옷을 짓는 손이 있었다


마침내 눈 쌓인 운동장


걸을 수 있는 발이 있었으나

달리는 것은 본래 아이들의 일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말없이


커버린 손바닥 발바닥 자국을 듣고

바람을 가르는 웃음소리를 보고

겨울눈 자라는 모습을

가만가만 만진다


어머니,

지금 내 이마에 내리는

이 빛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


여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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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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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자유는 사랑일 거라고,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 김진영의 마지막 산문집이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를 읽었다. 제목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흐 해석에 명망이 높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였다. 쉬프는 매일 아침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를 연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연주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는 2017년 영국의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을, 2018년에는 2권을 인터미션 없이 연주했다. 연주시간은 2시간 30분가량이었다. 나는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저자가 들은 아침의 피아노가 어쩐지 바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책을 기다리면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가 몇 개 월 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나는 그 친구들이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므로,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만 보면, 친구들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저자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임종 사흘 전까지 쓴 일기를 엮었다는 소개에, 얼마간 유치하고 얼마간 적나라하고 얼마간 절박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는 굉장히 조마조마했다. 이미 결말을 알아버린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그의 갈망과 의지가 읽혔다.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평화로웠기를 바라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페이지의 일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208)

 

시인 이문재는 <오래된 기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기도하는 것이다나는 저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이 동행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하듯 저자는 본인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29)” 하기 때문에 더 살고 싶다고 썼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21) 고민하고, “부드러움을 잃으면 안 된다”(58)고 다짐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직립보행을 하려고 애썼다(248).” “살아오면서 늘 정갈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39)”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또 한 가지 바란 것은 육체와의 동행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육체적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36).” “나는 이제야말로 나의 몸을 사랑하고 믿을 때가 되었음을 안다(127,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재인용).”고 쓴다. 놀랍게도 그는 그로부터 약 9개월 후, 그러니까 세상을 뜨기 두어 달 전 이런 글을 남긴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230).”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233)”을 느낀다. 그의 몸은 죽어 이 세상에 없지만 나는 그가 육체적 싸움에서 이겼다고 믿는다. 그는 마침내 정신과 육체의 동행에서 비롯된 자유를 얻었다.

 

그의 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짤막한 문장에 리듬감이 실린다. 어떤 구절을 읽고 멈추는 시간은 반대로 길어졌다. 책을 배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268)”이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나는 멈춰 사진을 찍었다. 한참 바라보았다. 그의 글은 시가 되었다.

 

임종 직전의 20188월의 글은 간결하다. 간결하다 못해 단어 하나하나만 나열되어 있는 날도 있다. 그제야 여백에 시선이 갔다. 그 여백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몇 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사흘 전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는 죽으면서 삶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을 증명해내는 데 성공했다. 첫 산문집이자 유고작이 된 이 기록은 그가 바랐던 대로 타인에게 의미가 되었다.

 

몇 시간 전 잠실에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그는 멘델스존, 브람스, 바흐를 연주했다. 매일 아침 연주한다는 평균율 클라비어는 아니었지만, 그의 바흐 연주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어떤 영광을 몸으로 겪은 듯했다. 무대에 선 자유로운 영혼은 많이 보았지만, 나는 바흐를 연주하는 쉬프처럼 정갈하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영혼은 처음 보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아니,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렇게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쉬프는 오늘 앙코르로 무려 여섯 곡을 연주했다. 첫 앙코르 곡은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 중간에는 피아노 조금 쳤다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545 1악장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그 유명한 도미솔 시도레도하며 사랑스러운 선율이 시작되자 관객들이 즐겁게 웃었다. 앙코르를 거듭할수록 박수갈채는 점점 더 커졌고 그는 진심으로 관객들을 향해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무대에서 퇴장했다. 백발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짐작은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철학자 김진영이 아침에 듣곤 했던 피아노 음악은 바흐였을 것이라고. 지극한 자유는 사랑일 거라고.


덧.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었어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이 세상보다 자유로운 세상이기를 기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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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alyn 2018-11-0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요일 같은 공간에 계셨던 분이군요. 리뷰에 마음이 움직이는 건 처음이네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2018-11-0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그곳에 계셨군요 :) 안드라스 쉬프를 좋아하신다면 이 책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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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긴 이야기를 다 해낸 작가의 인내와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적은 없었다.
한 사람의 소멸, 어둠속에 자신을 방치할 수밖에 없던 시간, 그럼에도 자신을 지켜낸 사람들,
구로와 인천과 호찌민 같은 공간들, 영화와 극장과 시네마 키드라는 단어들,
책을 읽는 동안 며칠 머물렀던 삿뽀로의 호텔까지.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설정 탓에, 혹은 덕분에, 읽는 내내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가, 살얼음판도 어차피 내가 만든 것이니 그럴 바에야 지뢰게임으로 만들자 싶었다.
처음엔 무작위로, 나중엔 치밀하게 클릭하다가 지뢰가 있는 칸을 터뜨리면
다음 판을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쉬었다 가도 될 테니까.
살얼음판을 깨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걷기보다는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서 터지는 대로 터져주었다. 여기저기, 빵! 빵!
그럴 때마다 멈췄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는 얘기다.
멈춰선 건 대부분 슬픈 대목이었는데, 김금희가 그리는 슬픈 장면은, 눈물이 치밀어오를 듯해서 
아예 체념하고 울기를 선택하면 정작 눈물은 나지 않고 끅끅 소리만 올라오는 이상한 울음을 동반했다.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았을걸, 
평소엔 울기도 잘 우는 내가 그렇게밖에 울지 못하다니 억울하다 생각하면서
다음 문장을 읽으면 작가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하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슬퍼질 준비가 되어 있는 얼굴로 웃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의 곁을 떠나지 못하듯, 
그렇게 <경애의 마음>을 끝까지 읽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누군가를 걱정하고 살피고 있다.
경애와 상수는 은총을, 은총은 경애와 상수를, 
경애의 엄마는 경애를, 조선생은 딸 영서를, 헬레나는 동생 에일린을.
그렇게 걱정하고 살피는 마음이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 곧 경애의 마음이 된다.

그런 경애의 마음이 내 앞으로 배송되어 온 가제본이라는 종이뭉치에 한가득 들어 있었다.
책이 액체나 기체라면 그 마음이 가득 차서 여는 순간 넘쳐 흐를 만큼.
다 읽고 나니 그 마음이 훤히 다 보일 것 같아 슬픈 기쁨이 벅차 오를 만큼.

그런데 왜 평소엔 보이지 않을까, 그 마음들은.
왜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을까, 왜 꼭꼭 숨어서 어떤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까.
왜 늦기 직전에 나타나는 걸까, 혹은 왜 다 늦게,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나타나는 걸까.

마지막 단락을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단락을 읽고 나서,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라는 걸 특정할 수 있다면-를 감히 알 것도 같았다.
김금희는 마치, 그런 마음들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바로 여기에 있다고,
'폐기해서도 안 되고 폐기할 수도 없는' 마음들이 분명 있다고, 나는 보았다고, 
그런 마음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금까지 써왔고, 
앞으로도 계속 쓸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런 작가가 있어 든든하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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