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철도 - 최영미 시집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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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쉬운 길을 알면서도 일부러 사람이 안 다니는 새 길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사람.

슬픔이나 절망에 녹아 흐물대지 않고 단단하게 속이 차있는 사람.

그리고 이 시인을 항상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스스로의 손톱이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겠다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지난 몇 년 간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우리 모두에게 환멸의 시간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를 공항에 데려다 줄 것으로 믿고 탄 '공항철도'는 역방향이었다.

 

  뒤로 가는 열차에 내가 탔구나 - <공항철도> 중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29년만의 시집 <공항철도>에는 두 번째 서른의 진심이 들어 있다.

더는 잔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성숙함으로 이제는 주먹을 꽉 쥔 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드러낸다.

사랑과 열정, 분노의 세월을 하도 많이 겪어봐서 앞으로 다가올 어떠한 사랑과 절망도 더는 두렵지 않은.....

여전히 씩씩하고 매혹적인 앨리스가 있다.

 

  제가 흘린 눈물을 마시며 연명하다 / 잠에서 깨어났다네 - <늙은 앨리스>

 

  

봄이 오기 전에
겨울을 내다 버렸다
겨울에 겨울을 버리는 재미

어떤 사연도 없는 코트
나 말고는 누구의 눈도 즐겁게 못한
따뜻한 모직 100퍼센트
무겁지만 무거운 줄 몰랐지
첫사랑이니까

처음 입을 때는 무척 설레었는데
2월의 햇살이 닿자
수명이 다한 애인터럼 거추장스러워
언제 버릴까 기회를 엿보다
아무렇게나 접어
세탁소에 던지고

두터운 겨울 코트를 벗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이가 되었다

<사랑의 종말> 전문 - P38

나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
냄비를 두 개쯤 태워 버리면 시집이 완성된다
고구마와 달걀을 불에 올려놓고
어제의 시를 고치느라
냄비 바닥이 검게 그을려
내 팔과 어깨만 아프지
수세미로 긁어도 없어지지 않는 죄
시와 생활을 감히 섞으려 했으니 혼 좀 나거라

<죄와 벌> 전문 - P89

적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이 문장을 이해하는 자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누구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5분 안에 웃길 수 있다

나의 본질을 꿰뚫은 어떤 개그맨에게
이 시를 바친다

<최영미> 전문 - P31

지루함을 참지 못해
하얀 토끼를 따라가 구멍에 빠졌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죄
열쇠가 있어도 문을 열지 못하고
(열쇠구멍이 너무 크거나 작았지)
집에 가지 못해, 자기가 누군지도 잊고

생쥐 앞에서 어리석게도 "고양이"를 찾다가
도와주려던 친구들도 떠나고

제가 흘린 눈물을 마시며 연명하다
잠에서 깨어났다네

<늙은 앨리스> 전문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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