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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언젠가 믿을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사는 나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놀랍기만 했다가 나중에는 궁금해졌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보았다기보다는 느꼈을 거라고, 저절로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거들먹거리네, 하는 생각도 따라붙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마음이 고통스럽거나 슬플 때 멍하니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빛을 향해 뻗어 가는 수관, 바람에 수런거리는 잎사귀, 경이로운 수관기피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땅 속에서 전진하는 뿌리를 상상하곤 했다. 바람이 불면 순하게 잎을 흔들어 바닥에 빛과 그림자를 반짝이게 하는 나무 덕분에 어떤 시간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저 살아 있을 뿐인 나무 덕분에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으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 말고도 그 나무를 보았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들과 이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어떤 나무’는, 내 일상의 나무들과는 무척 다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기만 할까? 나는 목화처럼 뒤섞인 존재가 아니라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또한 천자처럼, 미수처럼, 목화처럼 손 쓸 새 없이 죽음으로 휩쓸려 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늘을 사니까. 무자비하고 비논리적인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 갑자기 끌려가 죽어가는 사람을 무력하게 보아야 하는 일들을, 나도 당신도 겪고 있으니까. 그들만의 숙명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이들 모두의 숙명처럼 느껴졌다.
‘생명이라는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 살려달라는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생명에 관심이 없는 신, 해변의 모래알보다 작은 행성에서 홀로 존재하다 홀로 사라지는 인류’. 우리는 목화처럼 누군가가 지금 이곳에 잠시나마 실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는, 우리 곁의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단 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여기에 잠시 머무르는 게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온전한 것 아닐까?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했다. 아마 나무를 보면 이 이야기가 생각나겠지, 그런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