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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이길게요'의 마지막 모음이 동그랗게 말린 입술 끝에서 아직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벌써 침상 위에서 방금 분명히 잠들었던 것 같은 고양이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팠다.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어찌 됐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에 관한 이야기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100살 넘게 살지도 모르고,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그리고 많은 결심들을 한다. 나는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오래되었고, 실제 그렇게 살게 된 것은 1년 정도 되었다. 병상에서 여러 번 생각했다.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니,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빨리 기를 수 있었다. 피해의식이 느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닉슨을 떠올린다. 닉슨의 노력과 선량함을 떠올린다. 그런 훌륭한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린 피해의식에 대해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한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명으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그냥 쓰지 않는다. 내용만큼이나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전처럼 드러내놓고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웃는다. 비굴하게 웃을 때도 있고 상냥하게 웃을 때도 있다. 나는 이제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쓴다.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그것이 포스가 말하는 균형이다. 언젠가 반드시 여러분의 노력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말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끊임없이 가다듬고 정진하고 버틴다면 반드시 그날이 온다.
혈액암으로 투병생활 후 다시 건강해져 우리 곁으로 돌아온 허지웅 4년 만의 신작 에세이를 만났다. 허지웅의 <버티는 삶에 대하여>에 대한 서평을 다시 읽어보니 완전 팬이 되어버렸다고 적혀있다. 또 그 서평을 쓰는 도중에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기록의 중요성. 갑자기 그 전화를 받았을 때가 기억이 난다. 둘째 임신 중이었는데, 남동생이 놀라지 마라며, 아빠가 쓰러져서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전화. 그때의 나는 경력단절과 육아로 인해 버티는 삶을 살고 있었기에 허지웅의 책으로 위로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혈액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돌아온 허지웅은 조금 달라져있었다. 단단해져보이면서도 좀 더 부드러워진. 예전엔 옳은 말을 뱉으며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독사였다면, 지금은 온화한 할아버지 느낌이랄까. 산전수전 다 겪으면 사람이 부드러워진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허지웅은 이제 옳은 말 독설보다는 젊은이들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려고 한다. 그도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자립하며 힘든 시절을 지냈다. 자기처럼 깜깜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젊은이들을 도와주고 있다. 자기 삶이 불행하다며 한없이 우물을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그는 우물 밖으로 나와 타인의 손을 잡아주려 한다. 한번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면 아등바등 살지 않는다. 내가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일까? 좀 더 유해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미간 찌푸릴 일이 적어진다. 좀 더 성숙해진 허지웅의 글을 전작보다 더 좋았다. 예전엔 많이 냉소적이라 느껴졌는데 이젠 인간미도 느껴진다. 그가 아프지 않고 오랫동안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