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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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 뭍의 여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버려졌어요. 배에서 버려지기도 하고, 계집애는 필요 없다며 부모가 던져 버려지기도 하고, 가끔은 원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없어 절망하거나 끔찍한 일을 당해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몸을 던지기도 하죠. 모두 물 바깥의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버려진 여자들이에요." _19p /황금비파

괴물을 죽인 남자는 영웅으로 대접받지만 괴물을 죽인 여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괴물을 죽이고 호수의 여왕이 된 여자는 버려진 모든 여자들과 함께 차갑고 고요한 물 밑에 머무르며 피를 먹는 황금 비파를 연주한다. 갈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질 수 없었던 땅 위의 삶,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애도한다. _43p / 황금비파


"엄만 어렸어. 힘들어서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어. 어린 너한테 떠들고 울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엄마 말, 듣고 있니? 그땐 다 그랬어. 지금처럼 애들 정서가 어쩌고 하는 걸 몰라서 다들 애 보는 데서 죽네 사네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고 그랬어. 엄마도……."_65p/망선요


세상 어디엔가 남성에게 생물학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인류와 비슷하지만 다른 종의 개체군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단성생식을 하는 가재가 생태계를 파괴하듯, 그들 역시 인간 사회에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이를 때면 더더욱. _100p/아마존몰리


표지가 떨어진 오래된 사진첩엔 군인이었던 시절의 아버지의 사진과, 임신한 엄마와 용두산 공원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엄마의 얼굴엔 우울이 가득했다. 단 한 장도 웃는 얼굴이 없는 사진이었다. 나는 끔찍함에 비명을 지르고 싶고, 사진을 찢어 버리고픈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_139p/ 폐선로의 명숙 씨


엄마의 과거 따위 몰라도 좋았다. 이기심이었다. 오직 내 엄마이기만 하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곁에 두려고 엄마의 단절을 단절로 버려 두었던 것처럼, 나 또한 엄마를 엄마로 두기 위해 엄마의 단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_141p/ 폐선로의 명숙 씨


죄인인 나를 빼면 모두 아내를 둔 남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못난 부인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닙니다. _153p/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


"나는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으며, 나의 행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_163p/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


"여자들은 있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히잡을 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병역의 의무를 지거나 아이를 낳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도 없고, 나라 밖으로 나올 수도 없지만, 자기 의무만 다했다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아냐. 그녀들은 가부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까." _231p/ 감겨진 눈 아래에


어머니가 나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가임기 여자들을 덜 가르치고 안 가르치며, 나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해서, 어떻게든 아이를 낳게 만들고 말겠다는 저 정신 나간 정책들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무렵의 일이었다. _235p/ 감겨진 눈 아래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여자는 대학원에 갈 수도, 외국에 유학을 갈 수도 없었다. 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면 그 일가는 무서운 벌금을 내야 했다. 여자를 그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가축으로만 보는 듯한 그 정책들 덕분에, 부모님의 망명은 순조롭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나는 여기서 태어났다. _237p/ 감겨진 눈 아래에


"저희 어머니도,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늘 말씀하셨어요. 여자가 일을 하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승진을 하려면 '명예 남성'이 되어야 하는 세계라고. 일을 잘하는 남자들의 세 배쯤은 노력해야, 그 무리에서 가장 하찮은 남자와 비슷한 정도로 일을 잘하는 것으로 봐 주었다고요." _245p/ 감겨진 눈 아래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의무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고. 성령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천부인권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그런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도, 그녀는 십이 년형을 받았다. _278p/ 감겨진 눈 아래에


재경은 어렸을 때 정말로, 여자들이 전 세계를 주름잡는 팝스타가 되는 것을 보았다. 재경이 살던 동네에는 여자 국회의원도 있었다고 했다. 재경의 어머니도, 교수였다. 그때에도 물론, 유리천장이 남아 있고 불평등한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지만, 적어도 수많은 가능성들만은 있었다. 좀 더 시대가 변하면,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그때는 더 많은 가능성들이 보물상자처럼 열려 있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며 자랐을 것이다. _305p/ 감겨진 눈 아래에


공창에서 성과급을 주어 가며 낳고, 나중에는 젊은 여성들을 병역의 의무라며 징집해서 낳은 아이들을. 3D 업종에 종사하는 기층민으로 만든다. 돈을 써서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도입하고, 사람들의 노동력에 충분한 보상을 쥐여 주는 대신, 죽든 다치든 학대를 당하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싸구려 목숨들을 찍어 낸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권리를 알려 주지도 않아, 그렇게 머리 숙이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인생들을. _313p/ 감겨진 눈 아래에


"여긴 말이죠, 다른 나라들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복지를 강화하고, 임금을 올리고, 인간의 힘으로 하기 힘든 일들을 자동화하고, 좀 더 공정하고 인권이 보장된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젊은 아이들을 질투한 노인들, 여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한 남자들, 그리고 그들을 부추겨서 가급적이면 기업과 국가에서 돈을 안 쓴느 방향으로 국민을 쥐어짜기로 작정한 정치가들이 하나 되어 최악의 길을 택한 것뿐이에요." _319p/ 감겨진 눈 아래에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한 법이지. 욕구를 풀어 주고 생글생글 웃어 주고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자기 아이를 낳아 줄 여자 말이다."

"뭐라고요?"

"여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더니, 그 여자들은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더군." _334p/ 감겨진 눈 아래에


근미래 디스토피아부터 판타지까지, 혹독한 가부장적 세계의 속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여성 서사 작품집!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다. 아, 알고 읽었지만 속 시원하기도 하고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버림받는 여자들. 바다가 잔잔할 때는 비파를 연주해주니 좋다고 춤추던 사람들이 배가 전복될 것 같으니 바다에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비파를 연주하던 여자를 버렸다. 결국 그것들 다 죽어서 속이 시원했지만. 그렇게 버려진 여자들이 바닷속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억지로 신부가 된다..

매일 아내와 딸을 때리는 남편을 죽인 여자는 남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진다. 죽여 마땅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공개 처형을 받겠다는 여자, 그 여자는 딸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약자를 때리고 학대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죽어야 한다. 법으로 심판을 안 해주니 스스로 죽이는 수밖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버지의 수첩을 열어 본 딸. 엄마가 좋아서 기억을 상실한 엄마의 신분증을 숨기고 임신 시켜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저씨, 그거 범죄예요. 엄마는 무의식에 자신의 삶을 붙잡고 있는 지긋지긋한 딸을 목졸라 죽일 뻔한다. 그 기억은 엄마와 딸 기억 깊숙이 봉인되어 있었고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끔찍하다. 좋아서 그랬다고?

마지막 단편이자 책 제목이기도 한 <감겨진 눈 아래에>는 정말 끔찍한 작품이었다. 나라가 드디어 미쳐서 여자들을 애 낳는 짐승 취급하기 시작했다. 남자만 군 복무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23살 이전에 애를 낳던가, 아니면 군대 복역을 하라고 한다. 근데 그 군대에서 하는 일이 강간당하는 거다. 모르는 남자들에게 하루에 열다섯 명씩 상대하며 임신하면 애국부인회에 끌려가 끔찍한 태교 끝에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진통제 하나 없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나라에 존속된다. 다시 돌아와 남자를 상대하고 또 아이를 낳고. 처녀막 유무로 등급을 나누어서 여자들을 관리한다. 재경은 이런 미친 나라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현명한 부모가 파리로 망명가서 낳아줬더니 한국에 외국인 신분으로 관광차 갔지만 망명자의 자식은 '한국인'이라며 성폭행이나 다름없는 신체검사를 당하고 처녀가 아니란 이유로 '3급'으로 분류되어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그녀는 극적으로 파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자신이 겪은 일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그 와중 개념 없는 한국인 남자 기자가 와서 나라를 욕 먹인다고 난리부르스. 미친놈. 물론 소설이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서 그런가, 감정이입 제대로 돼서 남편이랑 싸울 뻔함. 마음 잘 부여잡고 읽기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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