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00쇄 기념 에디션)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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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따라 더 기세가 등등한 내 마음속의 도깨비도 이 말에는 반기를 들지 못했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고, 내일을 위한 희망이 있어 행복하고,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은 나도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였다._42p

'왜?'라는 물음에 나는 별로 논리적인 답을 할 수 없다. 그냥 내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난 그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신에게 내가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내 병은 나와 가족만의 비밀로 하고 몰래 투병하기로 했다._61p

민숙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있다더구나. 검은 돌은 불운, 흰 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그래서 삶은 어떤 때는 예기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여 넘어지고, 또 어떤 때는 크든 작든 행운을 맞이하여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아마 너는 네 운명자루에서 검은 돌을 몇 개 먼저 꺼낸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보다 더 큰 네 몫의 행복이 분명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_117p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_122~123p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_144p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_183p

"그래도 지금 내가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내 자유의지야. 여차하면 차 버리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길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이 인생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_208p


처음 보는 작가였는데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었다. 만 1살 때 고열로 인해 소아마비가 되었고 3번의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세상의 기준으로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가 책을 내고 한국에서 내노라는 대학에서 교수 일을 하기까지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오만했다. 그녀의 부모는 이북에서 내려와 맨손으로 육 남매를 길러내셨고 그녀도 부모처럼 강인하게 살아왔다. 장애, 비장애를 나누는 건 비장애인이 만들어낸 잣대로 오만함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을 느낀다. 외국인은 한국에 장애인이 없는 나라라고 오해한다고 한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동안 무심했던 게 미안해진다. 슈퍼맨으로 유명해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당신은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이 되었다'라고 말할 때마다 무척 언짢았다면서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지요라고 말했다. '역할을 부여하는 상대가 비단 유명인 뿐이겠는가 우리는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직업' 등등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을 하지 못한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나는 누구인가?' 자문해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을 찾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직도 유효한 것은 그 답을 찾지 못해서일 테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은 약속시간에 거의 늦고, 방향치이며,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밉지가 않다. 다른 사람이면 단점이라고 말할 법한 그런 것들도 그녀만의 문체로 인해 새로운 이야기로 태어나고 있다. 에세이 책이라 그녀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것보다 나는 그녀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오만하지 않으며 지루하지 않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약자로 살아가면서 불쾌했던 경험담을 어깨에 묻은 먼지 하나 털어내는 듯한 성격하며, 암이 생겼을 때 세상의 불운을 다 자신이 짊어지는 것 같다고 억울함을 내비치는 솔직함과 방향치 때문에 고생하니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다가도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 평생을 헤매지 않겠다는 현명함, 경험에서 깨달은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는 나무 같은 마음, 그녀를 보면서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떤 책은 읽는 도중에 작가가 궁금하여 검색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그녀의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궁금했다. 그저 긍정적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는 부족한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스님이나 수녀님이 쓴 책은 종교적인 냄새가 나고 '착하게 살아라'라는 메시지가 강하여 읽는 내내 석고대죄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나 부족한 사람이야, 나 못난 곳이 많아- 그러면서도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마- 인생은 소중한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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