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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괜찮지 않았던 날들
허윤정 지음 / 자화상 / 2018년 4월
평점 :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처음들이 가장 샘난다. 지금과 달리 서투르고 미숙했을 그가 마주했을 처음들. 아직까지도 기억에 박혀 있고, 쭉 박혀 있을 예정인 처음들. 되돌릴 수도 없는 처음들.
그 처음이 내가 아니었음에….
아, 정말 질투난다. (50p)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건, 이때까지 참 당연하게 살았다는 것이었다. 항상 있었던 밥도, 더러워지면 다시 깨끗하게 치워지던 방도, 춥지 않고 덥지 않았던 집도, 항상 안전한 줄 알았던 나의 동네도. 내일도, 모레도 당연히 내 삶에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 모든 건 부모님의 노력이었고, 사랑이었다.
그걸 혼자서 세상 밖으로 나와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깨달았다.(124p)
선물을 받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단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이를테면 선물을 사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해 알아보는 것, 나의 한마디를 오래 기억하고 있던 것,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닌 그런 것들. 날 생각하며 고민한 흔적들이 묻어나오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선물을 받는 건 마음을 받는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218p)
괜찮은 척하며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되던가. 아니 우리는 매일을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지. 그게 마치 '정상'인 것처럼. 모두가 '쿨'해져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내 감정을 고스란히 다 내 보이며 살 순 없을 거다. 그러나 실은 괜찮지 않았다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훗날 다시 꺼내 그때의 나를 위로해줄 수 있지 않을까. 결혼하기 전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의 처음 여자친구에게 질투도 하고 부럽기도 했었다. 지금 결혼하고 나서는 내 인생에, 그 사람 인생에 다른 이성은 없다고 '믿고' 살기 때문에 그런 질투 따윈 생각나지 않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믿고 사랑하며 살기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으니까. 어떤 책을 읽든 부모님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부모님의 사랑. 꼭 사랑해! 외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 나는 어리석게도 그 사랑을 아이를 낳기 전엔 몰랐었다. 스스로 큰 줄 알았지. 커서는 내가 다~ 알아서 잘 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지.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가 되어 보니 부모님 없이는 못 살겠다.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괜찮지 않았던 날들, 괜찮았던 날들, 슬펐던 날들, 행복했던 날들, 지우고 싶은 날들,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한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좋아하는 글쓰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께 들려주고, 함께 공감하고, 위로받고, 좋은 기운을 나눠주는 작가가 좋다.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기록의 글들을 써볼까 하지만 마음처럼 참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