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전후 민주주의 사상
나카노 도시오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삼인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이틀간 정신없이 읽었다. 재미있다고 하면 어폐가 있을 테고, 뭐랄까, 논의 치밀함과 광범위함에 감탄했다고 해야 옳겠다. 매우 유익한 책이란 생각이다. 삼인출판사의 안목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물들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저자 나카노 도시오는 이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전후 일본인이 가져야 할 사상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베버의 사회학 이론을 수용해 일본 사회학의 비조로 불리는 오쓰카 히사오, 그리고 '텐노'(천황)로 불리며 전후 일본 사상계를 휘어잡은 거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도마에 올려놓고 아주 정밀하고 날렵하게 칼질을 한다. 물론 이 두 거장의 사상이 주로 분석대상이긴 하지만,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다른 사상가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심지어 요즘 우리나라에서 내셔널리즘비판, 페미니즘이론, 젠더비평 등으로 자주 번역소개되곤 하는 우에노 치즈코조차 그 생각의 허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을 비판하는 저자 도시오의 칼날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전시기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이 깔끔한 단절을 이룬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판하는 제2장은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일본사상가들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한다. 몇몇은 알되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다. 국민국가담론에 익숙한 요즘의 젊은 인문학도들은 알 만한 사람도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사람을 꼽으면, 마루야마 마사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 정도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전후 일본의 책임론을 진지하게 파고든 비평가이자 시인으로, 우리에겐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마루야마텐노'로 불리는 일본사상계의 거인이라는 것, 그래서 그의 저작을 접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광휘에 휘둘려, 그를 읽어봐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진 적이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통나무에서 출간된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글머리에 있는 김용옥 선생의 글을 읽으면,  '텐노'니 '거대한 거짓말'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일본에서 그는 그만큼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 책속에서 김용옥은 마루야마라는 대학자에 대한 존경과 경탄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처음엔 짜증이 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씌어진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고 그가 바라보는 마루야마와 마루야마 사상의 문제점을 접하게 되면, 역시 김용옥이 명민한 인물이란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그의 형식은 잡스러운 반면, 그가 말하고자는 내용은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는데, 암튼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에서 김용옥 선생이 마사오를 학자로서 그 치밀하고 수준 높은 '필로로기'(문헌학)의 경지에 감탄하는 것이지 그의 필로소피에 감탄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듯이, '텐노'로 불리는 마루야마의 사상에는 일정한 결함이 내재되어 있음은 일본사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모양이다. 이 책은 그것을 선명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책이다. 정치학 연구자나 일본사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문헌으로 각광받는 마루야마 사상의 맹점을 이렇게 잘 풀어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개진하는 매개로 삼았던  에도시대의 '오규 소라이'과 메이지유신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해석을 잘 쫒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분들에겐 여러 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깃거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반드시 그걸 알아야 책의 주제를 파악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원제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 붉은 글자로 새겨진 "동원, 주체, 전쟁책임"이라는 것을 다루기 위해서 저자는 일본의 전후를 새로운 원점으로 규정하면서 국민통합을 주장했던 사상가들의 과오를 묻고 있는 것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15년간 이어진 일본의 총력전 체제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전후의 일본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본의 주류 사상가들의 내면에 어떤 모순적인 논리가 잠복해 있었으며, 그것에 노출된 일본이 어떻게 하여 아무 반성없이, 오늘날과 같은,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길을 걷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 도시오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것처럼 그의 전후 사상이 그의 전시기의 사상과 그리 깔끔하게 단절되지 않았다고 본다. 전시기의 총동원체제에 봉사하던 논리가 여전히 전후에서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진단에는 일본의 양심적(아니 엄격한) 지식인의 혜안이 느껴진다.

"전전과 전후의 진정한 단절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을 그저 선언으로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히사오와 마사오의 생각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선명히 끄집어 보임으로써 규명한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그 논의의 과정(논리전개)을 일일히 나열할 능력이 내겐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책임의 담론은 이런 이론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통과해야만 더 굳건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허상을 깨부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후 어떤 지식인도 "일본을 '깨는' 비판"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파괴 없이 구축된 건물 위에 옥탑방처럼 지어진 자원봉사, 비정부기구의 활동 역시 전전의 총동원체제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자문하고 있다.

나카노 도시오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올바른 전쟁책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면서, 자기가 분열되는, 다시 말해 주체가 분열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후 세대의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종군위안부'였던 피해자들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일로서의 전시 성폭력만은 아니다. 그녀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폭력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책임의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전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전시'를 이어받고 있는 이 '전후'에 대해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본문 277쪽)

"그런데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책임을 묻는 구체적인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동일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분열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나'가 불가피하게 자기 분열적인 갈등을 겪고 그것을 헤쳐가는 과정이다. 그 출발점은 '타자의 소리를 듣는 수동적인 체험'이다. 피해자의 소리가 나에게 들리는 방법으로 혹은 '듣게 되는' 방법으로, 그렇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91년 '종군위안부'였음을 밝히고 고발하기 시작한 김학순 할머니 등의 행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타자의 출현은 그것 없이는 직시할 수 없었던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려주고, '나'에 대해 과거와의 관계를 묻고 죄책감 없이 만들어져온, 또는 '무구함'을 의심하지 않은 채 만들어져온 이 '나'의 동일성(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 (본문280-281쪽)

위의 인용은 일본 지식인의 전쟁책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내가 상처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내게 가져야 할 태도인 것 같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알겠다. 책임의 문제는 권모술수를 넘어선 곳에 자리한다.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뒤로 우리의 등에도 큰 혹이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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