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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
정이현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영은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p.18
20년째 '김 약사'로 불린 세영에겐 만 열네 살의 딸과 지방의 작은 호텔을 맡아 운영 중인 남편이 있다.
학급 반장이 된 딸, 도우를 따라 학부모 위원직을 맡게 된 세영은 오늘 있을 학교폭력위원회에 참석해야 한다.
세영의 동네는 도심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지방의 소읍과 비슷하다. 조성된 지 서른 해에 가까워가는 대단지 아파트 안에 사는 아이들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다. 이번 학폭위에 회부된 가해자 부모 모두 세영과 아는 사이였다. 세영은 그들의 표정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반면,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의 조부모라고 밝힌 보호자는 세영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정중한 말로 써 내려갔지만 요지는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달라는 것이었다.
남의 인생에 그렇게까지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세영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므로 이번 학폭위 회의에 반드시 불참할만한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무원은 오해를 바로잡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해를 확고히 하는 시도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상황을 그냥 놔두었다. 시간이 그렇게 갔다. -p.95
유산으로 받은 적자 상태의 호텔을 운영하는 무원은 집엔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가며 딸 도우도 아내 세영에게 전적으로 맡겨 버렸다. 무원은 호텔에 살면서 언젠가부터 자영업자들이 소통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마음을 두었다.
일상적인 게시물을 올리고 회원들과 간단한 댓글로 소통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한 회원에 의해 그 평화는 깨져버렸다.
그는 무원을 약국을 운영하는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가입 당시, 프로필 사진을 여자 배우로 설정하고 사업장의 종류에 약국이라고 적은 것이 화근이었다. 무원은 그가, 커뮤니티 모두가 은연 중에 오해 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 놈이 집요하게 연락 해 오기 시작했다.
세영이 학폭위를 불참 했던 날, 가해 학생들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니 기회를 주자는 쪽이 한 표 차로 더 많았다. 가해자 측은 결정에 승복했고 피해자 측은 불복했다. 학급 교체 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분개 한 피해자의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 등교 거부를 시작했다. 반면, 가해자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등교 했고 수업을 받았다.
개학을 일주일 앞둔 여름 밤, 사고가 있었다. 피해자였던 아이는 '미안해요'라고 적은 자필 메모만 남기고 3동 1층 화단에서 발견 되었다.
어른들은 재빠르게 빈소에 가지 않을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세영의 딸 도우는 빈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세영의 만류에도 그곳으로 갔다.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기억한다. 2,30대 여성들이 살아가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켜 화제가 되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그 뒤에도 정이현은 꾸준히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떤 작품에선 경쾌하게, 또 다른 작품에선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이번 작품에서 정이현이 담아낸 도시는 전형적이면서도 조소가 가득하다.
다들 안전지대에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온하다. 속을 들여다 보면 모두가 허울 뿐이다. 그 허울을 유지하기 위해 모른척 하고, 침묵하고, 꾸미며 살아간다.
회피하려고 하는 세영과 침묵하는 무원, 그 속에서 도우는 같은 반 아이의 죽음을 용기있게 애도한다.
“재건축되면 어쩌려고.”
그것은 무원만의 입버릇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 단지 거주민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해 말해야 하는 순간에도 ‘재건축되면’이라는 가정을 습관처럼 전제했다.
-p.24
하나의 파도에는 한 명의 서퍼만이 올라탈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먼저 타고 있는 파도에 올라타는 걸 '드롭'이라고 불렀다. 나도 모르게 드롭을 했다면 곧바로 사과하면 된다고 했다. 전 세계 비치 어디에서도 '쏘리'라는 한마디면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p.141
"조금 더 있을래요. 먼저 가세요.”
그 애는 진심인 것 같다.
“우리가 가버리면 아무도 없잖아요.”
그 애는 진심이다. 뜻을 알 수 없는 뜨끈한 감정이 솟구친다. 세영은 주저앉고 싶다. 도우가 바라는 대로 뒤돌아 나가주고 싶다. 강이의 빈소에 엎드려 오래오래 울고 싶다. 세영은 움직이지 못한다. 간신히 지금은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 짐작보다 더 빨리. 등 뒤에서 적막한 저녁의 구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p.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