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라도 시계의 시간과 의미의 시간이 같지 않겠지만 이 근처에 살았던 두어 해는 내 속에 녹아들어 괴상하게 변이되어 남아있었다. ...시계탑 뒤로 총칼이 스쳐가고 인마의 피가 뿌려졌을 누런 성벽이 보였다. 가만히 다가가 숨을 내쉬자 돌 틈새로 돋아난 풀들이 살랑거렸다. 안개와 풀 냄새가 온몸을 훑어내리자 몸속의 물기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시간이라는 매질을 통과한 돌 위로, 깊숙히 박혀있던 것들이 그려낸 무늬들이 묵은 핏줄기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154쪽
어둠 속에서 성벽을 이루는 해묵은 돌과 하염없이 돋아난 풀들 사이로 그들끼리 이어온 의연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패전의 수치를 은폐하려고 발버둥 친다한들 저 황갈빛 돌들이 묵묵히 뿜어내는 기억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162쪽
더없이 솔직하고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는 심연으로 내려가본 자의 표지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을 훌쩍 넘어설 만큼 자신이 튼튼해졌다는 말이 아닐까. 그는 내게 그런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지도 몰랐다. 나는 윤기있는 그의 스카프를 바라보며 그가 내게 던졌던 질문을 되던진다. ''뭐가 가장 문제였어요?"-248쪽
어디 봐요! 그가 장난처럼 내 손을 잡는다. 바위 틈으로 들어오던 파도 소리가 내 안에서 출렁이며 일어나는 파도 소리와 겹쳐진다. 환상처럼, 어둠을 가르며 배 한 척이 미그러져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대형침대다. 침대 위에는 자신의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네 사람이 각자 등을 돌리고 누워있다. 나는 무엇에 감전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실내의 공기가 미미하게 떨리며 늘어나는 것 같다. 그는 담갈색 스카프를 풀어놓는다.-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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