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쯤인가..아니다. 2학기였구나.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대학 들어올 때까지 내가 황석영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삼포가는 길>을 쓴 사람..이 전부였다. 근데 조선일보가 주최하고 이문열이 심사위원이었던 무슨 문학상에 후보로 오르는 걸 거부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고..또 그가 89년 방북사건으로 감옥에서 얼마간을 보낸 것도 알게 되었다.그런 호기심에서 사봤는데..80년 광주 이후의 '운동권' 활동가가 겪어야 했던 시대의 아픔들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와 결혼했던 평범한 여교사 -하지만 이사람의 태생 또한 비극이다- 와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아픔.. 그리고 작가는 그 아픔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해결책으로 '모성애'를 이야기한다.작년에 읽었을 때는 사실 잘 이해가 안 갔다. 갑자기 왜 모성애..?하지만 그의 최근작 <손님>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가 이야기했던 '모성애'는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50여년 전 해방정국에서 비틀린 역사를 화해시키려 한다. 이 소설의 공간은 북한이다..- 남북을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만은..그래서 태백산맥에서 나타났던 사회주의자와 손님에서의 사회주의자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또 이 소설은 기법상으로도 상당히 재미있는데..황해지방에서 죽은 사람의 저승길을 기원하는 굿의 12마당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야기하는 화자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후자는 전에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본건데 여기서 이런 서술방식이 가슴에 와닿는건 서로의 사정, 한계 등을 화해전에 따져보는 방식으로 적절히 활용되기 때문이다.쩝..한 권 밖에 안돼고 페이지도 얼마 안돼니일단 읽어보시길..읽고나면 황석영을 왜 큰 작가라고 하는지 이해가 될 거 같다 p.s 우리가 배운 문학.교과서에 실려있는 '주류문학'은 반쪽짜리 문학이다. 작년에 '한국 현대문학의 이해'를 배우면서 느낀건데..일제 강점기나 해방정국에서 씌어졌던 대부분의 좌파문학은 철저히 주류문학에서 배척당했고 그나마 자본주의 자유주의의 기준에서 아무문제가 없는, 우수한 문학작품 또한 몇몇 권력에 밀착한 작가나 비평가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버려졌다. 작가들 사이의 세력 싸움인 셈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엄청 놀라기는 했지만 좌파문학이라고 불리는 몇몇 작품들을 실제로 봤을 때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선동적인 말투. 작품 전면에 나타나 있는 이데올로기적 색채. 작품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조잡한 문학성.쩝..근데 얼마전에 집에 내려갔을 때 동생 언어영역을 갈켜주다가 본 지문에서 본 내용이다. 모든 예술은 처음에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실제적인 용도로 시작된다. 그치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용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순수한 예술로 진화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든지 예술이 완전히 사회적 환경과 격리될 수는 없다. 우리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은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격리될 수 없다. 다만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문학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이유는 그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방식이 문학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문학 이전의 문학' 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문학 이후의 문학' 만을 평가할 뿐이다..그렇다. 옳은 말이다. 이데올로기를 문학적으로 정말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도 '손님'은 멋진 소설인거 같다. 물론 소설의 중심이 되는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이고 여기서도 우리 민족의 외부에서 온 맑스주의와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