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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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지라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문화의 기원이라니, 제목부터가 생소하다. 문화에 기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기원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기원이라는 것이. 그러나 지라르는 단호히 말한다. 인류문화의 기원은 희생제의에 있으며, 그것은 지금은 비록 추상적으로 보이겠지만 그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벌어졌던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더 이상 구체적일 수 없는 사건이라고.

그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태초에 모방 경쟁이 있다. 모방경쟁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들 간의 무한경쟁을 말한다. 즉 스스로 주체라고 착각하는 주체가 상호적으로 서로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양자간의 차이가 무화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모방경쟁을 통해서 처음의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다만 경쟁을 위한 경쟁만이 남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분쟁을 유발한다. 이러한 갈등과 분쟁이 극한의 임계점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사회는 희생제의를 발견하고 실천하게 된다. 만장일치의 살해를 통해 사회는 모방경쟁이 야기한 위기를 해소하고 무고한 이를 죽였다는 공모자 의식 속에서 서로간의 차이는 복원되고 사회는 다시 안정을 회복한다.

문화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지라르에 의하면 이러한 최초의 살인, 즉 ‘초석적 살해’로부터 문화가 발생한다. 희생제의는 종교를 낳고 종교로부터 상징이 발생한다. 즉 사회는 초석적 살해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기억 속에서 처음의 살인을 반복하게 되며 이러한 ‘제의적 모방’은 인간의 상징능력을 증가시킨다. 오늘날 우리가 제도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 제의적 모방의 소산으로서 처음의 종교적 양상들이 효력을 잃고 다른 요소들이 강화되면서 제도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는, 그 근본에서는, 사회적 폭력의 제어장치이다.(p, 157; 160; 223)

2. 프로이트와 지라르

지라르가 말하는 모방경쟁과 짝패, 희생양의 개념은 분명 관찰 가능한 현상들이다. 한편으로 우리 안에서 경험적으로 이를 체험할 수 있으며  1) , 다른 한편 많은 신화와 문학, 문화적 텍스트 속에서 이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렇게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는 있겠지만 전면적인 지지로 돌아서기에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나는 희생양과 관련한 지라르의 논의를, 그 자신의 지적대로, 프로이트의 아류 쯤이겠거니 짐작했었다.(비슷한 맥락에서 욕망의 타자성 역시 라깡의 변주 쯤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지라르에 의하면, 자신은 ‘희생양에 대한 모호한 암시’ 이외에는 결코 프로이트에게 빚진 것이 없다.(p. 301)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신화와 마찬가지로 유죄로 인정함으로써 희생제의의 본질을 간과했다는 것이 자신과 프로이트의 차이라는 것이 지라르의 주장이다.

일단 그의 주장을 수긍하고 다시 지라르를 이해하면, 프로이트와 그의 공통점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지라르에게는 자신이 주장하는 희생양 이론이 너무도 명백하여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진실이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이 너무도 자명한 이 사실 그리고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희생양의 거짓말, 즉 신화에 들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출구가 봉쇄된 미로를 연상하게 된다. 즉 지라르의 이론은 그의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다시 말해 먼저 믿지 않으면 결코 수긍되지 않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개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도 적절하다. 지라르를 지지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고백대로 지라르는 스스로의 지적인 여정의 끝에서 자신의 이론이 이끄는 대로 실제 기독교도로 개종했다!

3. 성경, 드러냄과 감춤의 텍스트

지라르에 의하면 성경은 이중의 텍스트다. 한편으로 성격은 신화와 마찬가지로 희생제의의 양상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희생제의에 불과하다는 바로 그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후자를 이해하는 단서로는, 성경이 취하고 있는 시점이다. 즉 성경은 비난자의 시점이 아닌 희생양의 시점에서 씌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신화와 성경의 결정적인 차이인데, 신화에서는 희생양을 비난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무고한 자를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박해에 대해 ‘인지불능’ 상태라는 것이다.(p. 96)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나이다.’(누가 복음 23장 34절)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희생당하는 자, 예수의 입장에서 이 박해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죄 없는 자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지금까지 인류가 저질러 온 박해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박해자였다는, 우리가 박해했던 자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성경은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은 기록을 전해 주면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도 같이 주었다’는 것이다.(p. 280)   

 

 4. 기원에 대한 '인류학적 상상력'

'문화의 기원'에 대해 길고 집요한 논의를 이어가는 <문화의 기원>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텍스트이다. 특히 서구 문화의 온갖 전통과 담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전과 사례를 인용하는 두 사람의 현란한 대담을 쫓아가는 일은, 지라르만큼의 길고 집요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쨌건, 문화의 기원을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해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그에 대한 지지와는 별개로,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1) 좋은 아파트, 비싼 차, 명문대, 이지메, 붉은악마 등등 모두가 한 곳으로 달려가는 이 모든 일련의 현상들 속에서 지라르의 말처럼 차이가 무화되는 모방경쟁의 극한에 처해 있는 우리를 본다. 남들보다 낫게는 아니어도 비슷하게는 살아야 한다는 욕심이, 마치 피리소리를 좆아 돌진하는 들쥐처럼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남과 다르다는 사실 그 자체가 희생양으로서의 자격 조건이 되며, 그로 인해 내가 바로 그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까.(p.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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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하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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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의 작가이다. <철도원>은, 책으로 읽지는 않고 영화로만 본 참이다. 잘 생각나지는 않는데, 간단히 말하면, 평생을 철도원으로 보낸 한 철도원이 정년을 앞둔 어느 날 어려서 잃은 딸을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뭐 이런 어정쩡한 환상문학이 다 있담, 철길을 지키느라 딸과 아내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니 정말 일본적인 멘탈리티야, 이런 정도의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환상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왜 구태여 딸을 그 먼 과거로부터 데려와야 하는지 그것이 철도원의 생애와 어떻게 관련된다는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책으로 보았더라면 달랐을까.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는 신센구미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막부파의 친위대격라 할 것인데, 근왕파가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 타도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막부수호를 내세우며 최전선에서 싸운 사수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신센구미의 일원으로서 짧은 생을 살다 간 요시무라 곤이치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분명 2류다. 문외한들이 2류를 결정하는 기준이야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가름 짓는 2류의 한 기준은 소설적 메시지의 직접적인 설명이다. 이 책은 사무라이로서의 의가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있음을 시종일관 역설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사무라이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보편적으로 숭고한 가치를 보장받으려면 소시민적 가족애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소설이 이러한 신파적 가치를 용감하게 들이밀 수 있는 것은 소설이 그려내는 인물, 요시무라 곤이치로라는 인물에 있다.

내가 소설의 3대 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것을 배운 것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소설에서 인물의 형상화는 분명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한 요소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보며 번 돈이 아내와 자식의 입으로 들어갈 쌀이 될 것을 믿으며 머리도 못 깍은 채 사시사철 홑겹의 옷으로 버티는 좀스럽고 비루한 말단 무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존왕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하에 살인을 일삼는 불운한 사무라이는 설정은 분명 신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사다 지로가 그려내는 요시무라 곤이치로의 모습은 자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빼어 뽑게 만들고 만다. 아들에게 물려줄 보검이 피로 적셔지지 않도록 마지막 니부킨이 어떻게든 가족의 손에 전해지도록, 요시무라가 스스로를 할복하는 방식은 아무리 신파라 하더라도 그 진정성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간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얼마만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지, 요시무라 곤이치로를 통해 그 극단의 삶을 엿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다. 막부니 사무라이니 흔하게 말은 듣지만 도대체 막부가 뭐하는 데인지 사무라이가 뭐하는 사람인지 개념이 안 섰는데, 이 책은 막부시대와 사무라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봉건적 주종관계 하에서 사무라이의 위치, 막부 체제 하에서 탈번이 의미하는 위법성 등등, 막부와 사무라이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인에게 있어 사무라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사대부의 위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체제를 수호하는 관료 상비군이라는 점에서, 그에 걸맞는 혹독한 수련 과정과 엄격한 생활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조선과 일본은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한 쪽은 오롯이 문의 나라였으며 다른 한 쪽은 철저하게 무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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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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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의 작가이다. <철도원>은, 책으로 읽지는 않고 영화로만 본 참이다. 잘 생각나지는 않는데, 간단히 말하면, 평생을 철도원으로 보낸 한 철도원이 정년을 앞둔 어느 날 어려서 잃은 딸을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뭐 이런 어정쩡한 환상문학이 다 있담, 철길을 지키느라 딸과 아내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니 정말 일본적인 멘탈리티야, 이런 정도의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환상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왜 구태여 딸을 그 먼 과거로부터 데려와야 하는지 그것이 철도원의 생애와 어떻게 관련된다는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책으로 보았더라면 달랐을까.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는 신센구미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막부파의 친위대격라 할 것인데, 근왕파가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 타도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막부수호를 내세우며 최전선에서 싸운 사수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신센구미의 일원으로서 짧은 생을 살다 간 요시무라 곤이치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분명 2류다. 문외한들이 2류를 결정하는 기준이야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가름 짓는 2류의 한 기준은 소설적 메시지의 직접적인 설명이다. 이 책은 사무라이로서의 의가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있음을 시종일관 역설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사무라이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보편적으로 숭고한 가치를 보장받으려면 소시민적 가족애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소설이 이러한 신파적 가치를 용감하게 들이밀 수 있는 것은 소설이 그려내는 인물, 요시무라 곤이치로라는 인물에 있다.

내가 소설의 3대 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것을 배운 것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소설에서 인물의 형상화는 분명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한 요소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보며 번 돈이 아내와 자식의 입으로 들어갈 쌀이 될 것을 믿으며 머리도 못 깍은 채 사시사철 홑겹의 옷으로 버티는 좀스럽고 비루한 말단 무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존왕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하에 살인을 일삼는 불운한 사무라이는 설정은 분명 신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사다 지로가 그려내는 요시무라 곤이치로의 모습은 자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빼어 뽑게 만들고 만다. 아들에게 물려줄 보검이 피로 적셔지지 않도록 마지막 니부킨이 어떻게든 가족의 손에 전해지도록, 요시무라가 스스로를 할복하는 방식은 아무리 신파라 하더라도 그 진정성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간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얼마만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지, 요시무라 곤이치로를 통해 그 극단의 삶을 엿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다. 막부니 사무라이니 흔하게 말은 듣지만 도대체 막부가 뭐하는 데인지 사무라이가 뭐하는 사람인지 개념이 안 섰는데, 이 책은 막부시대와 사무라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봉건적 주종관계 하에서 사무라이의 위치, 막부 체제 하에서 탈번이 의미하는 위법성 등등, 막부와 사무라이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인에게 있어 사무라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사대부의 위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체제를 수호하는 관료 상비군이라는 점에서, 그에 걸맞는 혹독한 수련 과정과 엄격한 생활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조선과 일본은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한 쪽은 오롯이 문의 나라였으며 다른 한 쪽은 철저하게 무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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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30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