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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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리우의 전작 <종이동물원>도 참 좋았다. 먼저 표지에 종이접기 전문가인 장용익 작가의 호랑이를 활용한 것이 인상깊었고, 출판사가 이 책을 섬세하게 기획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도 전반적으로 공들인 느낌이 났다.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의 동양적 기질과 서양적 기질(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을 유려하게 표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장성주 번역가는 <종이동물원>으로 제13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번역은 전작보다도 훨씬 매끄러워지고 깊어진 느낌이었다. 특히 <심신오행>에서는 원작의 'gut'을 '뱃심'으로 번역한 부분이 정말 인상깊었다. (영어 원작은 LIGHTSPEED MAGAZINE 웹사이트에서 읽어볼 수 있다.) 또, '동기간의 터울' 같은 우리말 표현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높은 가독성과 몰입감을 동시에 선사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원서'가 없이, 장성주 번역가가 직접 켄 리우의 여러 단편들 중 공통되는 주제를 어느 정도 가진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앞으로도 장성주 번역가가 번역한 책은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석사 때 전공한 부분이기도 해서, 반도체 공정 중 Micro Photo Lithography를 '미세 포토 공정'이라고 번역한 부분(185쪽)이 좀 걸렸는데, 찾아보니 '포토 공정'이 업계에서는 널리 활용되는 용어였다. 비슷하게 우리가 '엠알아이'로 많이 쓰는 자기공명영상장치(MRI)도 '엠아르아이'가 표준어였다. 어째서?!)



전작에 이어 이 책의 표지가 주는 인상도 강렬하다. 우선 책 이름 부터가.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사실 이 문장 속에 어려운 띄어쓰기 용례가 참 야무지게 모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는 같은 이름의 단편에서 따온 것인데, 영국 시인 W. H. 오든의 <로마의 몰락>에서 따온 문구라고 한다. 시에는 "Altogether elsewhere, vast / Herds of reindeer move across"라고 되어 있고, 켄 리우의 단편 제목은 "Altogether Elsewhere, Vast Herds of Reindeer"이다. 번역 출판된 오든의 시집이 없는 걸로 보아 장성주 번역가가 직접 번역한 듯 한데, 시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제목으로서의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멋진 번역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상깊은 표지의 조각은 츠지야 요시마사의 작품 'Qilin'을 타케노우치 히로유키가 찍은 것이다. Qilin은 신화 속 동물 '기린(麒麟)'의 중국어 발음이다. 당연히 도자기 조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나무 조각이라고 한다. 츠치야 요시마사는 이렇게 극도로 섬세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사실 중국보다는 일본의 느낌이 물씬 나는 작업들이고, 표지에서도 그런 느낌이 많이 들긴 하지만, 왠지 '순록 떼'와 조각이 주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금색 선으로 이어져 썩 잘 어울린다. 김다희 디자이너의 역량이 대단하다.



켄 리우의 이야기는 여전히 좋았지만, 왠지 전작과 비슷한 패턴이 많이 보였다. 예를 들어 중국인과 그 문화에 호감을 갖게 되는 미국인 소녀 이야기(<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에서는 종이동물원의 <파자점술사>가 떠올랐다. 어쩌면 '싱귤래리티 3부작'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종이동물원의 <파(波)>에서 정신체로 진화한 인류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작가는, 이번 책에 실린 싱귤래리티 3부작에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납득할 만한 갈등들을 보여준다. 우리의 정신을 업로드 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작중에서와는 달리 원본을 손상시키지 않고 한 개인의 정체성/정신/영혼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몸에 남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게임 <SOMA>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일 흥미로웠던 작품은 <심신오행(心神五行)>으로, SF에서 '한의학'을 다루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진한 로맨스 소설일 줄이야. (웃음) 게다가 '뱃심'과 마이크로바이옴(장내미생물균총)까지 버무려내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비록 켄 리우 본인이 이민자 출신에 동양계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동양의 신비',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 지나치게 좋은 쪽으로만 묘사하는, 어찌 보면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한 한계도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주류 SF에서 아시아의 문화가 중심 주제로 다뤄진 적이 없기에 의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재밌기도 하고.



이제 <민들레 왕조 연대기> 같은 켄 리우의 장편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앞으로도 좋은 번역으로 계속 출판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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