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북프리쿠키 > [마이리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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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비폭력 프레임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가‘와 ‘하고자 하는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를 먼저 이야기 해야만 한다.

˝정부의 감시와 질서 유지도 일종의 폭력이다. 따라서 타자인 우리들 또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정부와 시민이라는 권력 체제 내에서 탈피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현 상황에 얼마나 적합한가? 우리는 이론적이고 가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실제-현실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집회-시위를 읽어 내는지, 그리고 어떤 시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더 효과적인지를 생각해봐야한다.

이제까지의 시위 문화는 어떠했는가. 우선 집회-시위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문화였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의 집회-시위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새로운 사람이 집회-시위 문화를 향유하기에는 집회나 시위가 가지고 있는 중년-남성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중, 궐기, 시위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머리에 ‘투쟁‘이라고 쓰여진 밴드를 착용한 아저씨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건 니 편견이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이다. 편견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수 많은 이들의 편견이다. 편견에는 실제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혹은 우리가 집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는 중요치 않다. 미디어와 이미지가 우리의 사고와 성향 체계를 구성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집회, 시위 혹은 총궐기라는 것은 노동자 남성들의 무리가 공격적인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폭력으로 마무리 하는, 수많은 ‘나‘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그것이었다. 이제는 섹슈얼리티와 세대,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시위가 필요하다. 모든 이들이 폭력에 대한 걱정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집회가 필요하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시위에 참여하더라도 맨 앞줄에는 서지 말라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면 성별이 어떻게 되든 나이가 어떻게 되든 간에 맨 앞줄에 설 수 있는 시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시위는 ‘하고자 하는 말을 왜곡 없이 전달‘ 했는가? 지금까지의 시위는 종북-불순의 프레임에 갇혀 제 목소리를 내는데 실패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시위가 갖는 특유의 폭력적 이미지는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소수‘의 목소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수‘로 하여금 ˝난 저들과 달라˝라며 구별 짓고 소수를 평가 절하 하게끔 만들었다. 소수의 목소리는 자기만의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번 시위가 공론의 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영향력은 사뭇 다르다. 폭력 없는 시위, 모범적인 시위는 언론에 의해 형성 된 것이며 비폭력은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폭력 없는 시위는 언론에 의해 호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 없는 시위가 언론을 호명했다. 시민들은 지배 담론과 지배 권력이 ‘여기까지만 놀아라‘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비폭력을 외친 것이 아니다. ‘나도 저기엔 참여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모이고 모여 더 큰 목소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비폭력을 택한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다수가 모여도 폭력이 없으면 소용없어! 라는 주장은 다수의 전제가 비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놓쳤다. 비폭력 프레임이 우리의 행동을 제한한다! 라는 주장은 비폭력 자체가 우리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만약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평화 시위라면 우리는 이쪽을 택해야 한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혔듯 푸코는 권력을 비판한 적이 없다. 오히려 푸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는 모든 것이 권력과 연관되어 있고, 권력만이 생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두가 한데 모여 귀기울이지 않으면 타자는 타자로 남을 뿐이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타자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질 수 있게끔 또 하나의 대항 담론-대항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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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험을 한 주 앞둔 목요일, 캐롤이 흐르는 카페 한 구석에 여자친구와 앉아있다. 이 아이가 경제 프린트를 넘기는 동안 나는 '사랑의 기술'을 재독한다. 아직 내가 새내기였을 때 그리고 이 아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그 때, 꽉찬 가슴으로 읽어나간 그 책이다. 사랑에 대한 수업을 듣던 그 시절, 프롬의 이론은 내게는 사랑을 담은 편지의 한 구절이 되곤 했다.

 이 책은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장으로 시작된다. 이 장에 따르면 인간의 사랑은 동물들이 보여주는 애착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그 순간부터 다시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성이 부여된 인간은 자연과 세상에서 부터 분리되는 자신을 너무나 잘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우리는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치 않지만 죽게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분리 경험은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든다. 그 불안은 우리가 평생 안고 살 그런 불안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이런 불안을 너무나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이성)'을 먹은 뒤, 그들은 자연과 결별한다. 그리고 서로의 성기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로부터 불안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헤드윅에 등장한 그리스의 남남, 여여, 남여 신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어떻게 세상과 분리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할 것인가. 답은 여러가지다. 개인적으로(술과 담배, 성적 오르가즘), 또는 집단적으로(카니발) 도취와 황홀감을 느끼며 합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집단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통해 합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니면 창조적인 예술의 작업을 통해 세상과 합일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롬에게 이는 모두 부분적인 답안들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에게 있어 완전한 해답은 오직 다른 사람과의 온전한 융합인 '사랑' 뿐이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합일'을 이룬다. 이는 나의 부분을 떼어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을 시장의 논리와 유사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주는' 행위이고 이는 개인의 통합성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지만(오히려 긍정적이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기위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에 '참여'하지 못하고 '빠지려' 노력한다. 사랑을 주기보단 '받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능력의 문제보다는 '대상'의 문제로 기억한다. 누구와 사랑에 빠질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질문이다. 내 사랑의 대상은 누구이고 언제 나는 이 사랑에 빠질까?

 곧 우리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을 하지만 수동적인 사랑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세상과 분리되게 된다. 인간들의 질문에 대한 최종 답안인 사랑은 여전히 불완전하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랑의 기술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어떻게 사랑을 '줄'것이고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서만, 신뢰는 신뢰로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정치적 문제를 떠나, 인간 실재에 대한 본질적 답안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기술을 길러야 할까. 이 아이를 위해 어떤 것을 줄 수 있을까. 일단 밥을 먹으러 가는 것 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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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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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왜 읽고 있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요.”


 이 짧은 문답에 푹 빠졌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주고받은 문장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둘째는 질문에 답하는 래리의 모습이 너무 공감돼서. 부끄럽지만 시카고 한 클럽 모퉁이에 걸터앉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책을 탐독하고 지식을 갈망하는 래리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는다. 이 책을 읽은 것이 14년 말이었던가. 그 이후로 이 질문과 답안은 수 없이 던져지고 받아졌다. 어느 순간 이 문답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불분명해졌는데, 오늘 글을 끄적이기 위해 다시 한 번 책을 훑자 떠올랐다. 그리고 느꼈다. 난 래리가 되길 원했었구나.


 고전의 매력은 언제 어디서 그 이야기를 읽던 간에 현재·이곳으로 가져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래리의 시대와 나의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이 1920년대 전후로 누렸던 물질적 풍요와 오늘날 느끼는 매일 매일의 배부름에는 차이점이 많지 않다(심지어 방금 편의점에서도 느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가져온 추락과 정신쇠약(그레이 메튜린이 겪었던)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부르짖음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920년대의 풍요와 1929년의 대공황 사이에는 시대적인 변화가 존재하는 반면 우리는 배부름과 취업난이라는 두 모순적인 상황 속에 양발을 한 쪽씩 넣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이렇듯 두 시대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나는 이런 상황적 유사함 속에서 나 자신과 래리를 동일시한다.


 소설을 읽으려 하면 난 항상 구도하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낀다. 구도적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헤세의 소설이나 서머싯 몸의 소설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 갖지 않는 고민들을 갖는다. 그들은 언제나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이 고민이며,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 구도자들에게는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온 거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와 같은 핀잔이 주어진다. 그리고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야. 그것은 남자의 필생의 과업이야와 같은 조언이 뒤따른다. 이는 내 삶 속 모습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할 일은 너무 많지만, 모르는 게 너무나 많기에 읽을 수밖에 없다. 난 항상 뭔가를 하고 싶어서 읽는 건데, 태클이 수 없이 걸려온다. “이걸 왜 읽고 있어?”이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해야 하는데 뭐 하고 있는 거야같은.


 그렇다면 왜 하필 ‘<면도날>’인가. 교수님이 이야기 하셨듯이 서머싯 몸하면 <달과 6펜스>아닌가. 숭고한 달(예술)을 쫓기 위해 6펜스(물질과 세속)를 내던져버린 폴 고갱의 매혹적인 이야기. 이해 받지 못할 것임에도 타히티로 떠나 간 예술가의 신화. 강렬하다. 비극적이다. 거룩하다. 그럼에도 난 그 소설이 아닌 <면도날>을 손에 잡는다. 왜일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이해를 위해 소설을 좀 더 멀리서 바라보자. 이 소설의 화자는 서머싯 몸, 저자 자신이다. 그는 소설의 주요 인물도 아니고, 사건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도 않다. 그는 전달자다. 그리고 대화하는 이다. 그는 래리의 구도적 삶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비추어준다. 이를 테면, 사교계에서의 명성을 위해 살아간 미국인 엘리엇이나 래리를 사랑하지만 드레스와 모피 코트의 안락함을 선택한 이사벨, 거친 삶 속에서 흔들거리다 죽어간 소피 그리고 대공황의 충격에 추락하지만 다시 제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레이 등. 몸은 그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대화하고 조언한다(저자의 직접적인 개입은 이 소설이 참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이다). 래리는 이 모든 삶 사이사이를 훑으며 지나간다. 그리고 래리의 구도적 삶과의 대비를 통해 인물 각각의 방향성과 주요 가치가 가시화된다.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삶도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래리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래리는 사회에서 도태될 인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며 그는 일생을 명성과 명예만을 위해 살았다. 구도자(래리)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몸은 그를 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그에게 안식을 전한다. 이사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모피 코트와 쇼윈도의 안락을 위해 래리를 포기한다. 심지어 래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소피를 망가뜨리기 까지 한다. 그녀는 소유한다. 하지만 몸은 그녀와 화해하고 평화로운 삶을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래리의 구도적 삶,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세속적 삶.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았기에 독자()는 갈등한다. 그리고 몸에게 질문한다. “래리는 어떻게 되었나요?”하고. 몸은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상상할 뿐이다. “아마 래리가 맨날 말했던 것처럼 정비소 일을 했을지 모르지. 아니면 택시 드라이버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래리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행로를 따르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데 만족할 것이다. 다만 적절한 때가 오면 나방이 촛불에 모여들 듯 확신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이끌릴 거라고. 그리하여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함께 나눌 것이다.”


 <면도날>의 매력은 이 지점에 있다. 몸에게 구도하는 삶은 중요하다. “이걸 왜 읽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폴 고갱을 원하지 않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하고 마는 이카루스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을 위해 6펜스를 내던지지 않는다. 그는 한 쪽 눈을 지그시 감고 6펜스를 들어 올린다. 달과 동전이 잘도 겹쳐진다. 몸은 흐뭇하게 웃는다.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은 뒤 달빛을 받으며 가던 길을 걸어간다. 삶의 고양을 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해서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각자만의 길이 있고 그 길마다의 가치가 있다. 늙은 소설가의 관록이 느껴지는 바이다.


 다시 나로 돌아오자. 나는 여전히 구도의 길을 원하는가? 그렇게 믿는다. 나 또한 래리처럼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 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삶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이사벨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즐겁게 살 것이다. 그렇다면 몸은 말할 것이다. ‘그 말도 옳다하고.


  니체는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라 한다. 스스로를 불태우고 만물을 창조하면서 그것들과 공존하는 태양. 면도날이라는 실존 고민 위에서 우리는 모두 태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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