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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의 유언
데이비드 케일리.이반 일리히 지음, 이한.서범석 옮김, 박홍규 감수 / 이파르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현대 서구 사회는 결코 포스트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비뚤어진 형태.
예수는 '내 이웃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의 질문을 받은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이웃인가'란느 질문을 받은 것이었다. 예수는 "나의 이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내 이웃이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범주화가 전혀 아니었다.
호의 - 두 사람 사이에 자유로이 창조되는 것으로, 타인의 육체를 통해, 타인에 의해 무언가가 오지 않으면 맺어지지 않는것이다...단지 우리가 결정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예수님은 이웃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부른 것이다.
회개- 죄가 아닌 깊은 슬품과 용서, 자비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죄를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외면 또는 결핍으로 본 신약의 이해 방식은 사라졌다. 신약의 시각에서 죄는 오로지 용서의 고나점으로 봤을 때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믿는 것은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은 은총으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축복이다. 회개는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감미로운 찬미다. 이 관계는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취약하고 무넌지기 쉽지만 항상 되살아날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자연이 항상 치유되는 과정에 있다고 여겨지든 말이다.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바라볼 때, 예수가 우리의 원형이고(예수가 보인 바와 같이) 어리석음이 우리의 지혜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점진적으로 상실해간 과정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자율르 제도화하기 위해 부단한 놀겨을 기울였다. 우선 고결한 어리석음을 바람직한 본분ㅇ로 삼았고, 끝내는 법적인 의무로 만들었다. 사마리아인이 한 것과 같이 친절해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당신이 이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어리석음이다. 이를 의무로 만들고 인간을 그 의무에 맞춰 분류하는 일은 잔혹한 형태의 착실함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독특한 어리식음의 역전은 복음이 악의 신비를 표상하기 때문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