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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밥통에 밥이 없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무일도 안해도 밥은 먹었다.
하루에 한끼라도 먹긴 먹었다. 사실, 그 한끼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들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놀고있는데, 배가 고플리 없다.
그래도 가끔가다, 미칠도록 배가 고파지는 주기가 한번씩 있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세상에서 가장 보람 없이 생을 끝마치는 밥이다.
노가다꾼의 밥은 건물로 바뀌고, 장사꾼의 밥은 돈으로 바뀐다.
소설가의 밥은 책으로 바뀌며, 정치가의 밥은 똥으로 바뀐다.
똥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나와 정치가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정치가는 돈을 받고, 나는 아무리 열심히 먹고 싸봤자, 한푼도 안나온다.
그래서 나는 적게 먹고 적게 뱉었다.
다른 이가 열심히 먹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쌀 때, 나는 깨작깨작 먹고
뒹굴뒹굴 뒹굴고 가끔씩 쌌다.
섭취한 영양분은 거의 소비되지 않고 배설되었다.

시작과 끝이 안 보였다.
끝이 어딘지, 점점 신경도 안쓰게 되고, 인생은 아무 일없이 뒹구는 것으로 되어갔다.
땀을 흘리고, 미치도록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없었다.

몸 속에서 오만 벌레가 무리를 지어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게오르그는 열심히 일벌레처럼 살다 본의 아니게 벌레로 변신을 당했지만,
나는 이 재미없는 인생에서 차라리 벌레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겪어 볼 벌레의 인생을 만끽하다가, 누구의 울음도 없이
방 한구석에서 죽어 썩어갔으면 싶었다.
의식이 끊기기 전에, '맴맴'을 유언으로 남기고.

맴맴.
맴맴.

어색한 울음이었다.
나는 몇 번 더 맴맴하고 울어보았다.
진짜 매미와 비슷해질 때까지 연습해보았다.

맴맴.
맴맴.

그래도 나는 인간이었다.
게오르그는 원하지 않은 채 변신했고,
나는 간절히 원해도 변신할 수 없었다.

세상이 좋아졌다.
그 증거가, 나라는 인간이다.
옛날엔, 이렇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했을테니까.

그러다가, 배가 고파졌다.
밥통엔 밥이 있겠지, 하고 밥통을 열었는데,
없었다.

비어진 밥통을 보며, 나는 인생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생각했고, 죽음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별 재밌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해도 너무 막연해서 실감이 안났다.
그렇지만, 비어진 밥통은 무언으로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저 세상 출발 카운트다운 시작했습니다.'

눈 앞엔 없었지만, 저 세상이라는게 어딘가 있음이 확실히 느껴졌다.
집엔 아무도 없고, 밥통에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밥통을 닫았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밥을 굶던 말던, 똥을 싸건 말건,
돈을 벌던 말던, 시간은 잘 지나간다.

밥을 마지막으로 먹은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마셨다. 배가 고파도 수돗물을 마셨다.
하루는 굶주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미칠 듯이 수돗물을 마신적이 있었다.
꾸역꾸역 물이 목을 타고 밀려들어갔다.
숨이 가빠왔고, 나는 토했다.
토사물은 건더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맴맴.
맴맴.

연습했던 매미 울음소리를 내본다.
나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손이었다.
눈을 감기 직전, 다시 맴맴하고 소리를 냈다.
그것이, 지상에 남은 내 마지막 흔적이었다.

맴맴.

창문 밖에서 진짜 매미가 울었다.
따라서 울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세상에서의 마지막 소리를 들었다.

맴맴맴.
맴맴.
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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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펼치는 대신, 내평겨 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러 참았다.
무언가 답답하고, 화도 나고, 열 받고, 그리고 슬프기 그지 없어서-
추적추적 처량하게 비라도 맞으면서 비극의 주인공 흉내나 내고 싶은 욕구가 몰려 와서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뿜는 담배연기에, 내리는 빗줄기가 구멍을 낸다.
내 가슴에도 몇 갠가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중 한 두개는 방금 생긴 것이다.
사장에게

"그동안 수고 했다." 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에.

사장이 내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미안하다' 고 했을 때,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순간 어안이 벙벙해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봉투 - 아마도 돈이겠지. 미안하다 - 사장이 나한테 뭔가 미안할 짓을 했었나?
그 두가지뿐의 단서로 사실을 유추해 내기에, 난 너무 둔했고 얼빠진 인간이었다.

어릴 적엔 탐정이 되고 싶었다.
멋있고, 똑똑해 보이고, 어른같고, 무엇보다도. 역시 멋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겐 장난으로라도 옛날엔 탐정이 꿈이 었다고 말 못한다.
커가면서 나는 내 사고능력, 신체조건, 그 외 나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알아갔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꿈꿨던 기대치를 밑도는 건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의 평균치조차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탐정은커녕, 탐정의 조수를 하기에도 모자라는 어리버리한 어벙이였다.

사장의 다음 스트레이트가 내 왼쪽 귓방망이를 날렸다.

"내일부터 안나와도 돼."

귀에 맞은 그 말은 반고리관을 타고 올라가 신경을 거쳐 가장 구석의 뇌세포에 전달된다.
전달받은 구석의 뇌세포는, 중앙의 뇌세포를 향해 전달을 계속한다.

'내일부터 안나와도 된대. 전달."
'내일부터 나, 나오지 말래. 전달"
'나오지 말래. 전달.'
'모가지래. 전달.'

모가지?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정중앙의 뇌세포가 무슨뜻인지 해석을 하고 나에게 알리는 데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다. 이 딜레이가 빠른가 느린가에 의해, 인간은 똑똑하다, 멍청하다,
빠릿빠릿하다, 굼뜨다, 가 결정나는 거겠지.
나는 - 멍청하고 굼떴다.

'짤렸어?'

그때는 너무너무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하고 해서. 그저 빨리 이곳과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뿐이라, 나는 봉투를 쥔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멈춰서서 봉투속을 확인하고, 뇌세포가 다시 느릿느릿 회전을 시작하면서 왜 바보같이 그냥 나왔지? 하고 후회한다. 항의도 해 볼걸. 따져도 볼걸. 그리고 돈도 모자라잖아. 전에 내가 5시간 더 일해준 만큼의 연장수당이 빠져있고.
뭘해도 항상 이런식이다. 한박자가 늦었다. 항의를 해야 할 타이밍에 항의를 못하고,
뛰어가면 버스를 탈 타이밍에, 뛸까 말까 고민하다 놓치고.
남들이 다 알아들은 얘길 나만 한참 모르고 있다 뒤늦게 알아채곤 뒷북치고.
지금도 그렇잖아.

'근데, 요즘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투덜댈땐 언제고-'

방학도 끝나고 해서 요즘엔 도무지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처음 면접보러 갈 때
사장이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한가지를 깨달았다.

결국 그랬나.

'나는, 사람 구하기 힘든 요즘 상황을 감당해서라도 짤라야 할, 그런 인간이었구나.'

시급 2700원도 감당 못해낸.
현재 스물 셋. 연애경험 없음. 키 170안되는, 고등학교 졸업의 - 암울한 인생이었다.

사장은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한지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선악을 대충 짐작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이런 꼴이 잖아.

첫날엔 셀수도 없이 빵꾸를 내고. 같이 일하는 사람에겐 폐를 끼치고.
이런 붙임성 없는 성격은 어딜가든 쉬이쉬이 친해지질 못하고, 왠지 서먹해지고.
이미 오래전에 이 성격으로 인해 손해보는 것 쯤이야 감수하겠다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면 뼈아프다.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다리던 버스가 왔는데도 타지 않은채.
멍하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셜록 홈즈. 애르큘 포와로. 미스 마플. 필립 말로. 진구지 사부로.
나의 영웅들은, 내가 어렸을 때 도 탐정. 컸을 때 도 탐정이었다.
어릴적 어린이용 셜록 홈즈의 모험을 읽으며 홈즈의 귀신같은 추리력이 흘렸고,
지금은 말로나 진구지 같은 하드보일드한 탐정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미칠정도로 하드보일드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흠잡을 때 없는 어른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약간 꾀죄죄한 정장을 걸치고

(그래도 멋이 난다는게 부럽다), 코가 뭉툭한 검정 구두를 신고 있다.
의뢰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가 내키면.
때로는 격렬하게 싸움도 하고, 때로는 느긋이 추리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고,
그 와중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아름다운 여자. 여자. 여자.
그러나 우리의 하드보일드한 탐정들은 접하되, 빠지는 일 없이.
사건이 해결되면 그들은 그 뒷모습만을 여인들에게 허락한채 떠나가고, 훗날 담배 한 개비와 함께

그녀들을 추억한다.

그러나 지금, 현대 사회에서 탐정이란, 단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직업이 되어버렸다.
탐정이 되고 싶어 하는 특이한 인간은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없다, 라고 부정은 못하겠지만,
어딜가도 탐정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탐정이 되겠다던 나의 꿈은 개인적인 능력부족으로 한번 막힌 후에, 사회형편에서도
막혀버린거다. 내 경우론, 사회에서 범죄를 없애버리고 싶다, 는 이유보다도
멋있으니까, 남자다우니까. 라는 불순한 이유이니까, 경찰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애당초 경찰같은 걸 내가 할 수 있을리 없잖아.

대신 나는 그 시대를 훔쳐보는 것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꿈을 위로한다.
19세기 초반의 런던 베이커가. 1950년대의 뉴욕. 그리고, 현대의 신주쿠.
그곳엔 아직도, 미궁에 빠진 복잡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탐정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감이 있었고, 개인적인 문제로 경찰대신 탐정을 찾는
의뢰인이 있었으며, 사건에 휘말린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고,
냉철한 추리력을 가진 탐정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겁쟁이였다.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추리소설 같은 것을 읽은 날에는,
항상 불을 켜고 잠을 잤다. 전기세 아깝다고 부모님께 혼도 났었지만,
나는 무서워서 견딜수 없어, 여전히 불을 켜고 잤다.
침대 밑에 영화 속 귀신이나, 소설 속의 살인마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워서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어 젖히고 칼을 든 살인마가 덤벼들 것 같았다.
'무슨무슨 살인사건' 이란 책의 표지조차도 무서웠다. 내가 잠든 새, 책 속에서 뛰쳐나와
나를 찌를 것 같았다. 
무서운 책을 읽은 후에는, 책을 책장 깊숙한 곳에 꽂고, 불을 환하게 켜고,
문을 꼭 닫아야지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책 속의 탐정들은, 어른이었다. 그런 일쯤이야 눈 깜짝할 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초인이었다.
그런 탐정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것 까지일 뿐. 내가 그 탐정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 무얼 하지?'

나는 다음 일자리를 구해 볼 기력조차 잃은 채, 그저 무책임하게 잠에 빠져들기로 했다.
창문 틈새로 보이는 어두운 풍경이, 공포와 쓸쓸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찾은, 어느 한 가게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검은 글씨보다 여백이 더 많을 이력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과연 이걸 내도 될까, 하고 고민했다. 한 번 능력부족으로 인해 거절당한 인간이, 다시
다음 일자리에 이력서를 내기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멀리서 그 가게가 보였다. 나는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들어가서 이력서를 제출할 만큼의 용기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나는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어느 키 큰 청년이 카운터에서 꽤 길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청년은 얘기를 마친 후,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나는 사태를 짐작하고, 잠자코 등을 돌려 도망치듯 가게를 떠났다.

못난 놈.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나는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로 통할지도 모르는 길을.
주위는 온통 낯선 풍경이었고, 불안했지만, 더 낯설고 불안한 건 복잡한 내 마음이었다.
하늘도 복잡한 얼굴 빛을 띄고 있었다. 또 한차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한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빗줄기가 머리를 사정없이
적시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보니, 머리 위에 커다란 다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리 밑에 세워진 조그마한 판잣집. 인적없는 드문 곳에 세워진 그 판잣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용케도 아직 벽 위에 지붕을 올려놓고 있었다.
잠시 비나 피할까, 하고 나는 그 판잣집의 문을 두들겼다.
습기가 가득 찬 썩은 나무는, 두드려도 왠치 신통한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퀴퀴하기도 하고, 톡 쏘기도 하고, 여하튼 한없이 더러운 게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바닥은 문 안이나 문 밖이나 똑같은 시멘트였다. 그 바닥 한구석에, 비워진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오래 전 날짜의 스포츠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깔고 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흔히들, 인간에겐 평생 기회가 세 번 온다고들 한다.
나에겐 아직 한번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기회라고 찾아온 손님을, 나는 대접하지도 않은 채 쫒아내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이미 나는 두 번의 기회를 맞이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가질 기회와, 그 꿈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
첫 번째 기회에서 나는 탐정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그 두 번째 기회는, 지금 바로. 이곳에 있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열이 오른 머리가, 기분좋게 식어가는 것 같다.

그 다음날, 나는 리어카에, 조그마한 책상 하나, 의자 하나, 몇가지 노트와 청소도구를 들고,
어제 그 판잣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책상 서랍엔, 어제 밤을 세워가며 써둔, '교하(橋下) 탐정사무소' 라고 크게 적혀있는 긴 종이가 돌돌 말아져 처박혀 있었다.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지은 이름이지만,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어감상으로도 별로고, 차라리 그냥 2번 후보 '굴다리밑 탐정사무소' 쪽이 나았나 싶기도 했다. 말이 좋아 교하지, 저건 '다리 밑' 이라는 말을 반억지로 한잣말로
바꾼 것 뿐이잖아.
그래도, 이름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인생에 있어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되든 안 되든, 꿈을 실현해 볼 기회.
그리고 세 번째 기회 역시 찾아오겠지.
인생의 마지막 기회. 그것은, 꿈을 포기할 기회.

그러나, 그 마지막 기회는, 좀더 오랜 후에 찾아오리라 - 하고
근거 없는 생각을 어렴풋이 품었다.

어제 내린 비가 거짓말이 었던 것처럼, 해는 쨍쨍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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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아침..
나는 출근을 위해 어느때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이 내 똥고를 후벼대는 배설의 욕구..
난 당황했다.
도착치까지 아직 몇정거장이나 남았고, 중간에 내려서 일을 보려면
개찰구를 나가야 하고, 그러려면 표를 다시 끊어야 하는데
주머니엔 퇴근할때 타고올 지하철비밖에 없었다.

설사는 계속해서 괄약근을 죄였다, 풀었다 하며 나를 희롱하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수 없어 살짝, 그러나 온 신경을 쏟아 미세한 컨트롤로 소리가 나지 않게
가스를 살짝 뿜었다.

옆자리의 사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앞에 서 있는 아저씨가 나를 노려봤다.
나는 마치 내가 뀐것이 아닌양, 태연히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누구야' 라는 입모양을 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가스가 이리 지독하다면, 그 본체는 어떻게 되먹은 것인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될것이라는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수는 네가 오른쪽 뺨을 맞거든 왼쪽뺨을 내밀어라고 하였지만
나는 오른쪽 괄약근을 풀어도 왼쪽 괄약근을 풀순 없었다. 푸는 순간, 나는 파멸이었다.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째서 지하철 공사는 개찰구 안에 화장실을 설치해 두 지 않은 것인가.
만약 설치해 두었다면 나는 아무 걱정없이, 알바 근무지의 여햏에게
'미안하다 똥싸느라 늦었다' 고 말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찰구 안에 화장실은 없었고, 나는 심각하게 '만약' 의 경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질러 버린다면,
내가 이 출근길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본적도 없을 듯한 괴물을, 몬스터를 꺼내 놓는다면
나는 어떤 운명을 맞이 할 것인가.

고약한 악취에 온 시선이 집중된다.
손빠른 누군가가 사진기를 꺼낸다.
여기저기서 사진찍는 소리가 들리고, 내 사진이 디시 뉴스에, 네이버 뉴스에,
다음 뉴스에 올라간다.
그곳에 올라가는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되겠지만, 일반 게시판이나 웃대엔
내 꼴사나운, 아마도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이고 고뇌하고 있는, 혹은
그 모든것을 초월한 배설의 쾌감에 안도하고 있는 한 아웃사이더의 모습이 그대로 비칠것이다.

나는 심각하게 지금까지의 그저 '평범한 아웃사이더' 로의 인생길에서
'은둔형 외톨이' 로의 클래스 체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배변의 욕구가, 이 개찰구안의 화장실 없음의 시스템이, 이 사회가
나를 은둔형 외톨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똥싸느라 늦었다' 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미안하다 오늘로 알바 그만둔다...밖을 못돌아다니게 됐거든.'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다.

아아 내 인생은 어떻게 되가는 것일까.
연애는 할 수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그 누가 지하철에서 똥싸고 사진찍힌 색퀴한테
시집오려 할까.

그 순간, 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개똥녀.

아아 그렇다. 내게는, 마지막 구원의 여신이 있었다.
미안합니다.
나 역시, 당신의 사진이 올라간 뉴스에 악플을 달았었습니다.
나에겐 평생 이런일이 없을 줄 알고, 그런 짓을 거리낌없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저는 이 말밖엔 할 수 없습니다.
제겐 당신밖에 없습니다. 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은, 지구상에 오직 당신 뿐입니다.
지하철에서 설사하고 사진찍히는 찌질이를, 비슷한 상처를 지닌 당신만은 받아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 손가락은 너무나도 짧고 굵습니다.
그러나, 길고 섬세하면서 너무나도 얇은 당신의 세번째 손가락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천생연분입니다.
당신이 저를 받아들여 준다면, 저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힘내서, 개똥같은 똥을 누어 보이겠습니다. 나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되, 똥만은 개의 것을 하도록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럼으로서 당신이 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저는 힘내서 똥을 누겠습니다.
선남선녀, 아니 설남설녀. 우리는 천생연분입니다.

아아 보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신혼여행.
목적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한 곳밖에 없습니다.
지하철.
턱시도 차림의 저와, 웨딩 드레스 차림의 당신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올라탑니다.
그리고 저는 바지를 벗고 설사를 하고, 당신은 하얀 장갑에 싸인 길고도 가녀린,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번째 손가락을 살며시 치켜 세웁니다.
여기저기서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듯 웨딩 촬영을 하고, ㅆㅂㄹㅁ-아마도 축하해요를 저렇게
외치는 듯 합니다-라며 환호성-비명-을 지릅니다.
사랑합니다.

제발, 부디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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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쓰고 있는걸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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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와 몬스터 - 드래곤 원정대 1부 1권
이상윤 지음 / 하이비전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곰곰히 생각해봤다.

어째서 이런 책이 나올수 있는걸까.

출판사 정도 되면 책에 안목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일단 글을 쓴다는 작가정도 되면

적어도 기승전결정도는 맞출 수 있을 것이다.(재밌든 없든 간)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하고 이 해리와 몬스터라는 정말이지 부끄러운. 이런 텍스트가 종이에

실려 나온다니 정말이지 이 종이의 원재료일 나무와 잉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을 인정하자. 이 책은 출판되었다. 당당히 서점한구석에서 다른 책들과 나란히 전시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도 존재이유는 있다. 어떤 쓰레기라도 세상에 존재할 이유는 하나정도 갖고있기 마련이다.

 

'내가 써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  ' ' 이런 책도 출판이 되는구나, 좋아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아마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전국의 작가 지망생들이 한둘이 아닐것이다.

해리와 몬스터, 부제 --벽에 부딪힌 작가 지망생을 위한 활력제-- 는 이렇게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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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2006-02-2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적절한 평이로군요

정말... 2008-02-01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보다 적절한 평은 있을 수 없겠네요... "이 종이의 원재료일 나무와 잉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공감입니다
 

 그는 타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무서워했다.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튀는 것을 죽기보다도 무서워했고, 싫어했다.
그는 절대 자신의 마이너한 취미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몰래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마이너한 취미를 즐겼다.
그 숨김이 워낙 필사적이었던 탓에, 아무도 그의 취미를 몰랐다.
그는 모두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에 공감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이상하고,
특이하고, 싫다고 생각했다.

 튀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처럼 군대에 갔다.
이 문제에 대해선 딱히 튀는게 싫어서가 아니지만, 별달리 빠질 방법이 없는 평범한,
적어도 신체적으로는 건강한 대한민국의 사내였기에 거의 대부분이 가는 육군을 지원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 담배를 배웠다. 최근 흡연자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해도, 아직 군대는
담배가 대세였다. 담배를 배우고 제대한 그는, 이제 담배를 끊으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는 금연이 대세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아르바이트 중 쉬는시간에 담배를 피우려는 사람은 그 혼자였다. 그는 그때 꺼내든 한 개비를 최후로, 담배를 갑째 버렸다.
그리고 두 번다시 피우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대중적인 대기업에 지원서를 썼다. 지원율이 높다는 사실에서 거꾸로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튀는 직장이 아니니까. 졸업 후 갑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며 해외여행을 떠난 한 친구를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힘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면접을 거쳐 그는 인턴사원에 발탁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단지, 못해서 튀는게 싫어서였다. 동기가 어쨋건 결과는 좋았다. 그는 인턴 연수 기간 중 항상 앞장서서 움직이던 동료 - 인턴 사원중 점수가 제일 높았다 - 와, 좀 어리숙하지만 때때로 비범한 구석이 있는
동료 - 합격한 인턴사원중엔 꼴찌였다 - 와 입사동기가 되었다.
 
그의 점수는 딱 중간이었다.

 중도 일직선인 인생에서 대기업 입사라 함은, 즉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는 이제 거기에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주위 동료가 야근을 하면 그도 같이 했고, 놀자 분위기가 되면
같이 놀았다. 애써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스스로의 업무만 열심히 했다. 업무에 대해서 왠지 그는 필사적인데가 있었는데, 그것은 역시나, 업무가 빵구나면 어쩔도리가 없을 정도로, 튀어버리니까 - 그게 이유였다.

 그는 분위기를 맞추되, 스스로는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모임을 주도하게 된 입사성적 1등 동기, 왠지 겉도는 성적 꼴찌 동기, 그리고 중간인 그. 어느 사건을 거치고 그들 셋은, 꽤 친하다고 할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 사건은, 회식 후 노래방에서 일어났다. 겉도는 사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마치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정의의 사자처럼 참지 못하는 1등 - 편의상 이렇게 칭하겠다 -이, 꼴찌 - 이 사람도.- 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한곡 뽑으라고 강권한 것이었다.
자기 딴엔 입사후 계속 겉도는 꼴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쪽의 태도는 한껏 자시돋혀 있었다. 결국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때 살며시 동기들의
튀는 꼴을 참지못하고 그가 끼어들었다. 조용한 어조로 그는 쌍방을 설득했고, 결국 사태는
꼴찌가 아무도 모르는 팝송을 정말이지 피를 토해가며 열창하는 것으로 끝나,  결과적으로
꼴찌는 더욱 겉돌게 되었고 1등은 자기가 억지로 강권한 탓에 녀석이 더 겉도는 꼴이 되었다며 꼴찌에게 사과했고, 그는 중간에서 중재를 맡았다는 이유로---이 셋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 친구가 되었더라도, 결국 개인은 개인일 뿐이다.
예전과 똑같이 1등은 참견쟁이였고 꼴찌는 외로운 늑대--다른 이가 보기엔 그저 가시 세운
불쌍한 고슴도치 였지만--를 지향했고 그는 언제나 쌍방을 말리는 역이었다.
그건 마치. 한쪽이 튀어나온 퍼즐조각 2개 사이에, 양쪽이 들어간 조각 하나가 끼어들어가 양쪽을 맞추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1등은 역시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인사담당 상사를 포함한 회사직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었고 꼴찌는 자기할일을 하긴 하는데 허점투성이에 항상 꾸중이고, 그는 언제나처럼 필사적으로 업무를 검토하며 검산에 검산을 거듭하며 월급을 받고 있었다.

 셋이서 술자리를 가지면, 항상 1등은 사는게 피곤하다며 푸념을 늘어놓았고, 꼴찌는 인정받고 칭찬받는 1등을 부러우했으며, 그는 묵묵히 두사람의 잔이 비면 채워주고, 또
채워주고 있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술자리였다. 가자, 하며 일어나는 1등을 붙잡고, 꼴찌가
조금 더 마시자, 하고 말하기 전까진. 꼴찌는 꾹 다물었던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찾으면서 마셨다. 마시고 또 마시던 꼴찌는, 계속된 폭음으로 쓰러지기 직전, 유언처럼 한마디를 말했다.

'-----씨, 좋아한다.'

그 ----씨의 이름은, 그도 익히 알고있었다.
그들 부서의 여직원이자, 1등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여성이었다.

꼴찌의 유언을 들은 1등의 표정이 굳어진 것으로, 그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1등은 꼴찌를 그에게 맡기고, 먼저 가게를 나갔다. 그는 착잡한 기분으로, 이미 뻗은 꼴찌를
앞에 두고 남은 술을 홀로 마셨다.

 다음날, 그는 예의 ----씨가 기쁜 듯 1등에게 안겨있는 모습과, 한쪽구석에서 무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꼴찌를 볼수 잇었다. 1등은 가게에서 그들과 헤어진 직후, 사귀고 있던
-----씨의 집으로 찾아가 프로포즈 했던 것 같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그 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1등은 여기저기서 축하인사를 받고 청첩장을 주고 하였고, 꼴찌는 여전히 겉돌며 업무를 빵구내고 있었고 그는, 제출한 지점별 판매실적
조사가 왠지 잘못되 있어서 '평소에 잘 하다가 갑자기 왜 그래' 따위의 소리를 부장에게 들으며 깨지고 있었다.

 삼총사의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예정되있던 인사이동에서 1등은 승진했고,
그는 남았으며, 꼴찌는 퇴직했다. 아니, 쫓겨났다.

 부서의 책상 2개가 동시에 비워졌다. 하나는 1등, 하나는 꼴찌의 것이었다. 1등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갔고, 꼴찌는 2층에서 1층으로, 그리고 밖으로 쫓겨났다. 평소 타인의 경조사에
누구보다도 민감하던 1등은 꼴찌에겐 최악의 조사일 퇴직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짐을 들고 사라졌다. 같은 부서의 다른 직원들이 1등에게 작별의 말을 건넸다. 그 역시 그 분위기에 동조하여, 1등에게 '헤어지게 돼서 섭섭하지만, 귀하라면 위에서도 잘하리다' 따위의 흔한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꼴찌는, 누구의 환송도 없이 회사를 떠났다.
꼴찌가 나가는 걸 뻔히 봐놓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동료들은 꼴찌의 모습이 사라지자,
'-----씨 언제갔어? 작별인사도 없이 그냥 홀랑 가버리냐? 하여튼 그 사람은---' 하며
당사자 없는 즉석 송별회를 시작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욱해서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역시 튀는 행동이다. 쥐약이다. 관뒀다.
대신 그는 꼴찌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전 마지막으로 말해주었다. 

'사실 니가 그때 부른 그 팝송, 나도 잘 알던 노래였어. 꽤 좋아했거든.'

 꼴찌는 아무 말없이 하하, 건조하게 웃고 전화를 끊었다.

 만약 그때, 혼자서 튀는 팝송을 부르던 꼴찌의 옆에서 함께 노래해줬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상처입고 으르릉 거리는 늑대에게, 살짝 귓속말로

'사실은 말야. 나도 평범한 인간인 척 하고 있지만, 너와 다를 것 없어. 나도 늑대야.'

 하고 한마디 해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뭐, 그다지 달라질 건--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한가지 사실을 끝끝내 숨기고 있는 한.
결국 꼴찌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실.

'그, 우리 부서 -----씨 말인데, 나도 실은 좋아했었어.'

왠지 눈물이 났다. 심한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꼴찌가 부러웠다.
비명처럼 '----씨, 좋아한다' 고 토해놓았던 꼴찌와는 달리 그에겐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는 결혼했다.
상대는 선을 통해 만난 평범한 여성으로, 곧 아이도 생겼다.
여전히 그는 평범, 중간, 튀지 말자를 스스로의 슬로건으로 삼았고, 입사동기 친구 1등은
승진을 거듭해 임원진까지 올라갔으며,

꼴찌는 그때의 마지막 통화 이후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첫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았다.
이혼을 당했다. 그는 도대체가 이유를 짐작할수 없었지만. 20년동안 같이 살아온 아내의
말에 잠자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당신은 물 같애.'

 지금까지 본적없는 험악한 표정으로 아내는 말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돈도 벌어왔다. 무신경한 아빠소리 듣지 않을 만큼은 가정에 신경도 썼다.
바람도 핀 적 없었다. 그런 그가 왜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해야 하는지 어안이 벙벙해있을 때, 아내는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물 같아. 독도 약도 될 수 없는 사람. 재미가 없어. 아무런 자극도 맛도 향취도
느껴지지 않거든.'

험악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는 한 사람 오래 전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 -----씨 좋아한다.'

그때 그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고, 지금도 역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나고 텅 빈 집에서, 그는 꼴찌가 떠났을 때와 같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꼴찌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먼 옛날의 친구를.
끝내 손을 내밀어주지 못했던,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던 상처입은 고독한 늑대를 찾아,
그는 이곳저곳을 헤메고 다녔다.

 꼴찌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새벽의 인력시장이었다.
후줄근한 차림에 하얗게 센 머리를 북북 긁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꼴찌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튀지 않는 그의 인상은 이미 험난했던 꼴찌의 인생역정 속에
깊숙이 파묻혀 버린 듯 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명했다.

아아. 그때의.

겨우 꼴찌의 머릿속에 옛날 기억이 힘겹게 머리를 내민 듯 했다.

'그때 기억나, 거 왜, 셋이서 마시러 갔을 때 니가 엄청 취해서--'
'으음. 기억 날 것 같기도 하고 안날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네가 누굴 좋아한다며 한마디 하고 픽 쓰러졌잖아.'
'그랬었나? 아아. 그런 적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댁이랑 있을 때 그랬던가?'
'그래. 그리고 사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꼴찌를 찾아온 거니까.
왠지 이 말만은 하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았다. 적어도 이 말을 하고 인생을 마쳐야 할 것 같았다.

'사실 그 -----씨, 나도 좋아했었어.'
'아아- 그랬어?'

 별 관심없다는 듯 꼴찌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숙제를 끝마친 기분이었다.
아아 후련하다.
스스로에게 솔직하다는 건, 이렇게나 후련한 것이었구나.

 꼴찌가 피워 문 담배 연기가, 불규칙하게 하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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