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펼치는 대신, 내평겨 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러 참았다.
무언가 답답하고, 화도 나고, 열 받고, 그리고 슬프기 그지 없어서-
추적추적 처량하게 비라도 맞으면서 비극의 주인공 흉내나 내고 싶은 욕구가 몰려 와서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뿜는 담배연기에, 내리는 빗줄기가 구멍을 낸다.
내 가슴에도 몇 갠가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중 한 두개는 방금 생긴 것이다.
사장에게
"그동안 수고 했다." 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에.
사장이 내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미안하다' 고 했을 때,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순간 어안이 벙벙해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봉투 - 아마도 돈이겠지. 미안하다 - 사장이 나한테 뭔가 미안할 짓을 했었나?
그 두가지뿐의 단서로 사실을 유추해 내기에, 난 너무 둔했고 얼빠진 인간이었다.
어릴 적엔 탐정이 되고 싶었다.
멋있고, 똑똑해 보이고, 어른같고, 무엇보다도. 역시 멋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겐 장난으로라도 옛날엔 탐정이 꿈이 었다고 말 못한다.
커가면서 나는 내 사고능력, 신체조건, 그 외 나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알아갔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꿈꿨던 기대치를 밑도는 건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의 평균치조차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탐정은커녕, 탐정의 조수를 하기에도 모자라는 어리버리한 어벙이였다.
사장의 다음 스트레이트가 내 왼쪽 귓방망이를 날렸다.
"내일부터 안나와도 돼."
귀에 맞은 그 말은 반고리관을 타고 올라가 신경을 거쳐 가장 구석의 뇌세포에 전달된다.
전달받은 구석의 뇌세포는, 중앙의 뇌세포를 향해 전달을 계속한다.
'내일부터 안나와도 된대. 전달."
'내일부터 나, 나오지 말래. 전달"
'나오지 말래. 전달.'
'모가지래. 전달.'
모가지?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정중앙의 뇌세포가 무슨뜻인지 해석을 하고 나에게 알리는 데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다. 이 딜레이가 빠른가 느린가에 의해, 인간은 똑똑하다, 멍청하다,
빠릿빠릿하다, 굼뜨다, 가 결정나는 거겠지.
나는 - 멍청하고 굼떴다.
'짤렸어?'
그때는 너무너무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하고 해서. 그저 빨리 이곳과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뿐이라, 나는 봉투를 쥔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멈춰서서 봉투속을 확인하고, 뇌세포가 다시 느릿느릿 회전을 시작하면서 왜 바보같이 그냥 나왔지? 하고 후회한다. 항의도 해 볼걸. 따져도 볼걸. 그리고 돈도 모자라잖아. 전에 내가 5시간 더 일해준 만큼의 연장수당이 빠져있고.
뭘해도 항상 이런식이다. 한박자가 늦었다. 항의를 해야 할 타이밍에 항의를 못하고,
뛰어가면 버스를 탈 타이밍에, 뛸까 말까 고민하다 놓치고.
남들이 다 알아들은 얘길 나만 한참 모르고 있다 뒤늦게 알아채곤 뒷북치고.
지금도 그렇잖아.
'근데, 요즘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투덜댈땐 언제고-'
방학도 끝나고 해서 요즘엔 도무지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처음 면접보러 갈 때
사장이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한가지를 깨달았다.
결국 그랬나.
'나는, 사람 구하기 힘든 요즘 상황을 감당해서라도 짤라야 할, 그런 인간이었구나.'
시급 2700원도 감당 못해낸.
현재 스물 셋. 연애경험 없음. 키 170안되는, 고등학교 졸업의 - 암울한 인생이었다.
사장은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한지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선악을 대충 짐작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이런 꼴이 잖아.
첫날엔 셀수도 없이 빵꾸를 내고. 같이 일하는 사람에겐 폐를 끼치고.
이런 붙임성 없는 성격은 어딜가든 쉬이쉬이 친해지질 못하고, 왠지 서먹해지고.
이미 오래전에 이 성격으로 인해 손해보는 것 쯤이야 감수하겠다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면 뼈아프다.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다리던 버스가 왔는데도 타지 않은채.
멍하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셜록 홈즈. 애르큘 포와로. 미스 마플. 필립 말로. 진구지 사부로.
나의 영웅들은, 내가 어렸을 때 도 탐정. 컸을 때 도 탐정이었다.
어릴적 어린이용 셜록 홈즈의 모험을 읽으며 홈즈의 귀신같은 추리력이 흘렸고,
지금은 말로나 진구지 같은 하드보일드한 탐정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미칠정도로 하드보일드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흠잡을 때 없는 어른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약간 꾀죄죄한 정장을 걸치고
(그래도 멋이 난다는게 부럽다), 코가 뭉툭한 검정 구두를 신고 있다.
의뢰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가 내키면.
때로는 격렬하게 싸움도 하고, 때로는 느긋이 추리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고,
그 와중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아름다운 여자. 여자. 여자.
그러나 우리의 하드보일드한 탐정들은 접하되, 빠지는 일 없이.
사건이 해결되면 그들은 그 뒷모습만을 여인들에게 허락한채 떠나가고, 훗날 담배 한 개비와 함께
그녀들을 추억한다.
그러나 지금, 현대 사회에서 탐정이란, 단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직업이 되어버렸다.
탐정이 되고 싶어 하는 특이한 인간은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없다, 라고 부정은 못하겠지만,
어딜가도 탐정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탐정이 되겠다던 나의 꿈은 개인적인 능력부족으로 한번 막힌 후에, 사회형편에서도
막혀버린거다. 내 경우론, 사회에서 범죄를 없애버리고 싶다, 는 이유보다도
멋있으니까, 남자다우니까. 라는 불순한 이유이니까, 경찰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애당초 경찰같은 걸 내가 할 수 있을리 없잖아.
대신 나는 그 시대를 훔쳐보는 것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꿈을 위로한다.
19세기 초반의 런던 베이커가. 1950년대의 뉴욕. 그리고, 현대의 신주쿠.
그곳엔 아직도, 미궁에 빠진 복잡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탐정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감이 있었고, 개인적인 문제로 경찰대신 탐정을 찾는
의뢰인이 있었으며, 사건에 휘말린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고,
냉철한 추리력을 가진 탐정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겁쟁이였다.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추리소설 같은 것을 읽은 날에는,
항상 불을 켜고 잠을 잤다. 전기세 아깝다고 부모님께 혼도 났었지만,
나는 무서워서 견딜수 없어, 여전히 불을 켜고 잤다.
침대 밑에 영화 속 귀신이나, 소설 속의 살인마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워서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어 젖히고 칼을 든 살인마가 덤벼들 것 같았다.
'무슨무슨 살인사건' 이란 책의 표지조차도 무서웠다. 내가 잠든 새, 책 속에서 뛰쳐나와
나를 찌를 것 같았다.
무서운 책을 읽은 후에는, 책을 책장 깊숙한 곳에 꽂고, 불을 환하게 켜고,
문을 꼭 닫아야지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책 속의 탐정들은, 어른이었다. 그런 일쯤이야 눈 깜짝할 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초인이었다.
그런 탐정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것 까지일 뿐. 내가 그 탐정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 무얼 하지?'
나는 다음 일자리를 구해 볼 기력조차 잃은 채, 그저 무책임하게 잠에 빠져들기로 했다.
창문 틈새로 보이는 어두운 풍경이, 공포와 쓸쓸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찾은, 어느 한 가게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검은 글씨보다 여백이 더 많을 이력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과연 이걸 내도 될까, 하고 고민했다. 한 번 능력부족으로 인해 거절당한 인간이, 다시
다음 일자리에 이력서를 내기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멀리서 그 가게가 보였다. 나는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들어가서 이력서를 제출할 만큼의 용기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나는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어느 키 큰 청년이 카운터에서 꽤 길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청년은 얘기를 마친 후,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나는 사태를 짐작하고, 잠자코 등을 돌려 도망치듯 가게를 떠났다.
못난 놈.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나는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로 통할지도 모르는 길을.
주위는 온통 낯선 풍경이었고, 불안했지만, 더 낯설고 불안한 건 복잡한 내 마음이었다.
하늘도 복잡한 얼굴 빛을 띄고 있었다. 또 한차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한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빗줄기가 머리를 사정없이
적시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보니, 머리 위에 커다란 다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리 밑에 세워진 조그마한 판잣집. 인적없는 드문 곳에 세워진 그 판잣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용케도 아직 벽 위에 지붕을 올려놓고 있었다.
잠시 비나 피할까, 하고 나는 그 판잣집의 문을 두들겼다.
습기가 가득 찬 썩은 나무는, 두드려도 왠치 신통한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퀴퀴하기도 하고, 톡 쏘기도 하고, 여하튼 한없이 더러운 게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바닥은 문 안이나 문 밖이나 똑같은 시멘트였다. 그 바닥 한구석에, 비워진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오래 전 날짜의 스포츠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깔고 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흔히들, 인간에겐 평생 기회가 세 번 온다고들 한다.
나에겐 아직 한번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기회라고 찾아온 손님을, 나는 대접하지도 않은 채 쫒아내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이미 나는 두 번의 기회를 맞이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가질 기회와, 그 꿈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
첫 번째 기회에서 나는 탐정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그 두 번째 기회는, 지금 바로. 이곳에 있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열이 오른 머리가, 기분좋게 식어가는 것 같다.
그 다음날, 나는 리어카에, 조그마한 책상 하나, 의자 하나, 몇가지 노트와 청소도구를 들고,
어제 그 판잣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책상 서랍엔, 어제 밤을 세워가며 써둔, '교하(橋下) 탐정사무소' 라고 크게 적혀있는 긴 종이가 돌돌 말아져 처박혀 있었다.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지은 이름이지만,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어감상으로도 별로고, 차라리 그냥 2번 후보 '굴다리밑 탐정사무소' 쪽이 나았나 싶기도 했다. 말이 좋아 교하지, 저건 '다리 밑' 이라는 말을 반억지로 한잣말로
바꾼 것 뿐이잖아.
그래도, 이름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인생에 있어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되든 안 되든, 꿈을 실현해 볼 기회.
그리고 세 번째 기회 역시 찾아오겠지.
인생의 마지막 기회. 그것은, 꿈을 포기할 기회.
그러나, 그 마지막 기회는, 좀더 오랜 후에 찾아오리라 - 하고
근거 없는 생각을 어렴풋이 품었다.
어제 내린 비가 거짓말이 었던 것처럼, 해는 쨍쨍한. 어느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