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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강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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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사회에 있어서 양반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양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인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수구보수 세력으로 농민들의 희생을 통해 안락한 삶을 영위했다는 계급적 인식과 양반들의 선비 사상과 학문적 기풍을 강조하는 전통주의적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리는 더 이상 갓을 쓰지도 않고, 학교에서 유교 경전을 읽지도 않는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우리는 양반에 대한 도덕적 평가나 이상화보다는, 양반이 존재했던 사회, 문화적 조건들을 통해 그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양반 문화의 영향은 제사일 것이다. 현대에는 제사를 안 지내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양반 문화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파급되었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유교문화가 기층으로 전해지는 데에 있어서 재지(在地)양반, 또는 향반(鄕班)의 역할을 강조한다. 재경(在京)양반이 고위 관직을 차지하며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면, 재지양반은 지방에 농지를 개간하여 경제적 기반을 넓히고 향약과 서원을 통해 지방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미야지마는, 18세기 이후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 즉 양반적 가치관, 생활 이념의 하층 침투를 핵심적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는데, 사회의 유동성이 증가한 근대에 들어와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은 한층 더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현대의 한국 사회를 돌이켜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양반 문화는 단지 집안 문갑 속에 있는 족보나 명절 때 지내는 제사처럼, 새로운 의미를 갖지 않는 과거의 잔재로만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근대식 교육을 통해, 양반에 대해 무엇을 비판해야 하고 무엇을 전통으로 계승해야 할 지를 분별하도록 배워왔다. 하지만 양반을 통해 보급되었다는 유교 문화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데에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서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자성적 대안으로 '아시아적 가치', 혹은 '유교적 가치'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해온 한국 사회에게 새로운 논쟁점을 던져주기도 한다. 양반을 통해 보급된 유교 문화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데에 중요한 고민 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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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 범우문고 9
카뮈 지음 / 범우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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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시지프의 신화>를 읽으면 이방인의 모호함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풀어내는 카뮈의 언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삶의 부조리함이 혼돈스러운 만큼, 오히려 삶에 대한 의식은 더욱 복잡하게 다가올 수 있다. 시지프가 언덕에 바위를 힘겹게 올려놓고, 다시 굴러내려간 바위를 향해 기진맥진하여 내려오는 그 인식의 순간에 카뮈는 주목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려고 노력하려 하지만, 죽음의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인식에 대한 사색이다. 바쁜 일상 가운데, 문득 주말의 황혼 앞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삶의 고단함과 무상함에 대한 인식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뮈는 바로 그 인식의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어떤이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인식이 지나친 허무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카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른다. 그는 서구의 절대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한계를 인식할 줄 아는 지성을 강조한다. 삶의 무의미함을 명찰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위대한 의식 위에, 카뮈가 명상하는 '언덕의 부드러운 선과 동요되는 마음 위로 드리우는 저녁의 손길'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허무에 이르는 것은 절대에 이르는 것보다 어렵다. 어쩌면 언덕을 내려오는 시지프의 고단함은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운명에 대한 사색은 어느 골목 모퉁이에선가 멈춰버린 것 같다. 이번 여름, 언덕 꼭대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명찰의 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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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 -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 민음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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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고대 문명의 발자취나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부족민들의 생활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접촉은 기이함에 대한 흥미로움에 그치거나, 고대 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감탄에 그치기 쉽다. 전체적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도 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소개된 마빈해리스의 저작들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하다.

<작은 인간>은 인류의 진화, 성향, 성에 대한 관념, 권력과 사회 형성 등과 더불어 인류의 미래를 전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제들은 단순한 흥미거리에 그치지않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우리 인류의 특성 및 성향에 대한 기원을 밝힘으로써 분석과 해체의 날카로움을 담아내고 있다. 그와 함께 우리 자신 스스로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 - 예를 들면 남성은 여성보다 공격적이다 - 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진화론을 옹호하면서도, 진화론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 문화선택의 작용에 대한 균형을 유지한다.이러한 균형을 바탕으로 현대 문명 사회의 진화적 기원과 함께, 역사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인류가 행해왔던 환경에의 적응과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그들의 결정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변화해온 인류의 운명을 돌이켜보면, 현대의 문명 세계도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하지만 문화적 선택 과정이 생물학적 진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마빈해리스의 주장에 비추어볼 때, 우리 현생 인류의 선택의 폭은 아직 넓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국가 중심적인 현대의 폭력적이고 분쟁적인 상황에서 이를 초월하는 지구공동체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마빈해리스의 주장이 다소 이상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자본의 세계화라는 음모 속에서 그 방향 모색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우리의 지향점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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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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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인간이 왜 이기적인가를 유전자로 설명해 주었다면, 매트 리들리는 이 책에서 왜 인간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고 서로를 도우면서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이미 동물과 인간의 이타적 행동은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행동을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지만, 그러한 유전적 메커니즘이 인간의 사회적 진화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그 책을 사회적 차원으로 발전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논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호 대결과 배신보다는 협동하도록 진화해왔고, 상호호혜적 관계의 안정성 속에서 배신자(혹은 free-rider)들을 도태시켜 왔다. 이러한 것은 소규모 사회(사회생물학에서 얘기하는 150명 단위)에서의 상호부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 역시 선물을 주고 받고, 결혼식, 장례식 때 부조하는 것에도 이러한 상호호혜적 관계(reciprocity)가 발전해 있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그는 인간의 이기적 사유화(privatization)를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오히려 환경과 같은 공공적 재산의 파괴를 가져왔으며(everyone's land is nobody's), 소규모 공동체의 공동 소유를 통해 호혜적 관계의 이타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선물을 주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과연 난 무얼 바라고 선의를 베풀게 되는걸까? 정말 이타적인 성품을 발전시키는 것은 먼 미래를 위한 투자일까? 매트 리들리는 사회사상, 사회생물학, 정치학의 게임이론, 인류학의 다양한 민족지 등 광범위한 지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한다.

하지만 결국 이타적 행위를 하게 되는 도덕적 성품(moral virtue)이 사회적으로 진화했다는 설명했다는 점에서는, 심리학적인 본질론으로 환원된고 만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사회생물학과 인류학의 실증적 자료들로 보여주려고 했던 인간의 이타성은, 형이상학적인 인간성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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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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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날 저녁 어느 카레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이야기이다. 사실 그의 이름은 기 롤랑이 아니었다. 단지 사설탐정인 위트가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고, '자, 당신 이름은 기 롤랑이오.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라고 말해 주었을 뿐이다. 과거의 자신을 알기 위해 실날같은 단편을 좇아 헤매는 주인공을 지켜보노라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의 과거를 추억하게 된다. 연속적이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아 안개 속에 흩어져 있는 기억의 단편들.

그 조각들을 조합하면 과거의 내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조각들 중에는 낯선 것들도 있고 어떤 것들은 혐오스럽기까지 하여 이질적인 괴물을 발견할 따름이다. 그럼 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년 가량 열심히 썼던 일기장을 들추면서 내가 그 일년을 어떻게 보냈었는지 회상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그 일기장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 일년 동안의 경험 중에 대부분을 기억해낼 수 없었고, 마치 그 일년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살아져버린 것 같은 서글픔에 사로 잡혔던 적이 있었다. 마치 실수에 의해 하드디스크가 포맷되어 버린 것처럼.

불과 일년 전의 기억이 그러할진대, 우리는 어쩌면 끊임없는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집착했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라져가고 무의미해져 가는 것일까? 소설 속의 위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우리들의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기억할 수 없고, 그래서 인식할 수 없다면 삶은 살아서 무엇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억에 기대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작가인 모디아노는 존재란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페드로라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전제 하에, 패드로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찾아간다. 때로는 페드로의 절친한 친구였을 지도 모르는 남자를, 또 페드로의 연인이었을 지도 모르는 어떤 여자를. 그들을 만나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중 그들은 주인공이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독자들은 함께 숨죽이게 된다.

그들은 그저 페드로의 사진 속에 우연히 찍혔던 사람이었거나, 페드로의 연인의 친구였을 뿐이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는 나와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 '아뇨,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는데요. 그렇지만 어쩌면...' 이렇게 페드로의 정체가 밝혀질 것 같은 긴장된 순간에 한 가지 단서가 미궁 속에 빠져드는 답답함이 반복된다. 그럴 때면 페드로는 다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로 나선다.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멕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페드로였다는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과 함께 찍혔던 한 여자가 그 사진 속에 울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다. 아마 우리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어렴풋이 맺혀 있는데도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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