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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천명관이 돌아왔다! <고래> 이후 실로 6년만이다. 명망 있는 출판사의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품이 워낙 대서사시 그 자체인지라 <고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알기론) 백이면 백 모두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출간하긴 했지만 그의 서사력을 다시 펼칠 수 있는 장편을 기대해온 독자들은 이번 <고령화 가족>이 출간되자마자 그의 이름 하나만을 믿고 구입했을 것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우연히 이번 작품의 표지도 <고래>때와 비슷한 붉은색인데 정열적인 그의 작품 색깔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좋게 말하면 옛날 이야기, 나쁘게 말하면 정말 뻥 같지만 희한하게도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고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고래>에 비해 <고령화 가족>은 장점과 단점을 일부 가지고 있다.
우선 생생한 캐릭터와 흡입력 강한 서사력은 여전히 그의 강점으로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서사력이 좋다는 것은 곧 가독성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설을 읽는 데에 중요한 점이다. 천명관 작가는 열혈독자라면 모두 알고 있듯 영화를 하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의 막강한 서사력조차 영화를 하기 위해 준비됐던 재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와는 달리 영화 쪽으론 잘 풀리지 않는지 연출을 한다고 한지 몇 년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연출 데뷔 쪽으론 소식이 없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작품의 첫 도입부가 더 흥미로웠으리라. 왠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쓴 것 같지 않은가. 모름지기 사람의 일이란 성공보다는 실패했을 때 이야기가 더 많은 법이고 사건도 더 많은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공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데뷔작의 실패로 인해 이혼까지 하고 이젠 월세 낼 돈도 없는 주인공에게 엄마의 전화가 걸려오고 구원의 손길을 받은 듯 그대로 그는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서 지겹디 지겨운 식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어릴 적부터 그를 두들겨 패대던 120kg 거구의 오함마(그는 한모란 이름보단 오함마란 별명이 더 친근하고 어울린다.)와 이제 막 두 번째 이혼을 하고 세 번째 남편을 맞아들이게 되는 미연과 그녀의 당돌한 딸 민경 그리고 칠순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화장품 판매를 하며 변함없이 이들을 먹여 살리는 엄마가 그들이다.
이 작품은 가족소설은 아니지만 캐릭터만큼은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틀에 박힌 가족의 모습이 아닌, 구질구질하도록 애물단지 같지만 결국엔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실생활에 있을법한 리얼한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 인물들의 단면적인 모습을 뒤엎는 반전 아닌 반전의 모습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돼지처럼 먹기만 하고 방귀만 뿡뿡댈줄 알았던 오함모는 티격대던 조카 민경이 가출하자 말없이 나가 믿음직스럽게 데려오기도 하며 바지사장의 위치에서 교묘하게 약장수를 따돌려 평생 쓸 돈까지 마련하고 평생 함께 살 여인 수자까지 얻어 저 멀리 어딘가로 영웅처럼 떠나버린다. 그리고 남성편력 심하고 떽떽대는줄만 알았던 미연은 사실은 어린 나이부터 술장사판에서 힘들게 일해 알게 모르게 가족들을 돕던 여린 여자였으며, 한 평생 아버지와 자식들만 아는 줄 알았던 엄마는 불륜으로도 모자라 그로 인해 얻은 아이까지 평생 형제들이 서로 모를 만큼 말없이 키워온 비밀스런 여자이다. 알고 보면 이렇듯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몰랐던 면이나 비밀이 있었다거나 내게 일어날거라 생각지 못했던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그런 게 우리네 삶 아니던가.
평균 나이 49세인 이 애물단지 같은 가족들. 작가는 왜 하필 주인공들의 나이대를 이렇게 정했을까? 단순히 어느 정도 인생사를 겪었지만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사회에 평균 88만원을 받는다는 이 시대 20대보다도 하나같이 막막해보이는 루저들이지만 어떻게든 결국엔 헤쳐나가는 인생들. 아마도 작가는 한 뭉탱이 같지만 다양한 이 인물들을 통해 이 시대 가족의 현주소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 이렇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읽기는 쉽지만 전체적으로 가벼운 인상과 득의만만하게 열었던 초입에 비해 결말 부분이 기대보다 약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것은 마치 한 편의 멋진 로드무비 영화를 봤다가 홈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칠순 노모는 불륜남과 살림까지 차려놓곤 결국 뜻밖에 죽음을 맞지만 그 밖의 모든 인물들은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자잘한 치고 박음이 이어지다가 오함모로 인해 드디어 반전다움이 나오며 나름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마무리되면 이야기도 끝나버린다.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에게도 무언가 스펙터클한 사건이 일어나 좀더 흥미미진진해지길 바랬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밉상이었던 오함마가 생각지도 못하게 멋지게 한 방 날리고 뜬 것처럼 우리의 찌질이 오감독에게도 반전을 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현실을 배반하는 어울리지 않는 반전이었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데뷔의 실패를 만회하지 못한 채 에로영화들로 풀칠이나 하지만 자신처럼 실패를 맛보고 돌아온 캐서린을 만나 모험 대신 평온에 안착한다.
이러한 아쉬움은 어쩌면 전작인 <고래>와의 비교 때문에 더 생기는 것 같은데 모든 작품이 좋을 수 없고 그래도 단점보다는 그를 커버할 장점이 더 많은 작가이기에 단점이라기보단 아쉬운 점 정도로 넘어가자.
이 작품의 단연 미덕은 바로 교훈을 말하지 않고 똥폼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독 헤밍웨이에 관심이 많은 주인공은 헤밍웨이처럼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스스로 인생을 끝내는 멋진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건 전쟁과 권총자살 대신 복닥거리는 가족사와 마흔이 넘어 다시 만난 돌싱의 삶이다.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생이니 어쩌면 이 이야기 후에 그가 재기에 도전해 뜻밖의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삶을 이어가야 후지든 멋지든 다음 사건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