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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별이 총총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9
배영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선배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등단한 시인인 줄 몰랐다.
나처럼 스무 살 티를 갓 벗은,
그러나 아직은 후드티를 즐겨입는 또래라 여겼다.
그것은 선배가 동안이라는 얘기도 되겠지만,
그는 늘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는 쪽이었다.
어느날부터인가 선배가 너무 좋아지고
선배의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싶어지면서
나는 그의 등단작부터 찾아 읽게 되었다.
선배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선배를 바래다줄 때면
늘 선배집 앞의 철길을 건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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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겐 후진이란 게 없다, 그걸 알 때까지
아이들은 습관처럼 손을 흔들었지만
되돌아오는 건 늘 매캐한 기름 냄새뿐이었다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질주하는 풍경엔 관심조차 없었으므로,
그 어떤 답례나 화답은 없었다
비릿한 쇳내와 주인 모를 지린내를 맡으면서도
기찻길 놀이터엔 언제나 때 묻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누가 누구랑 x x 했다는 붉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써진 철교 위에서는
사춘기를 거치지 않고
재빨리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아이들이
달려오는 기차와 정면으로 마주치곤 했다
그것은 어른이 되기 위한 이곳 기찻길 동네만의 통과의례,
몇 해 전 한 사내가 철로를 안고 자다 객귀가 되었고
점(占)집 봉식이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기차의 제물이 되고 말았지만
강물은 언제나 그런 영혼들을 무심히 받아먹곤 했다
객기와 담력을 구별하기엔
기차는 너무 빨랐으며 강물은 너무도 태연히 흘렀다
철교 아래서 듣는 기차 소리가
내 몸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내 치마폭도 조금씩 요동을 쳤지만
제풀에 꺾여버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거대한 바퀴가 바퀴를 끌고 가는
그 끝없는 갈증이
어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 <바퀴는 무럭무럭 자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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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나는 또 선배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차츰 잊게 되었다.
그는 글 쓰는 사람입네 하는 포즈 대신
작고 좁은 말에 오래 몸 떨구었고
아픈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좀 수척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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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엄마의 수레꽃밭을 시멘트로 봉해버리고
아버지는 하릴없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날들이 늘어만 가신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신다
- <수레국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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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대학원 강의시간에 선배가 갖고 온,
이 시집엔 실리지 않은
'어떤 시를 쓰고 한동안 아파야 했다'는 글에 묻어 있는 아득함을
이제 조금 느낀다.
이 시집의 표지이기도 한 보라빛은
그런 점에서 선배를 참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