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공화국
강수돌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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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 대한민국 국민이 앓고 있는 다양한 중독증후군을 정치하게 기술한 책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증상도 실로 다양하여, 예컨대 스마트폰중독부터 시작해서 쇼핑중독, 성형중독, 일중독. 학교중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중독현상을 알뜰하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중독에 공통으로 내재하고 있는 원동력을 뇌화(腦化) 사회뇌에 치우친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뇌화 사회는 중독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폭주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신체는 결코 폭주하지 않는다. 때때로 찰나의 신체적 쾌락을 추구하다가 그만 회사동료와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다!!”와 같은 표현을 신문 기사 등에서 볼 때가 있는데, 이것만큼 언어사용이 잘못된 예도 없다.

신체는 결코 찰나의 쾌락 같은 것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찰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뇌다.

술과 담배와 마약은 ‘drug’이다. ‘drug’향정신제(向精神剤)’를 의미하지 향신체제(向身体剤)’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성중독즉 섹스의 쾌락도 그 95%는 뇌에서 유래한다. 만약 섹스의 쾌락이 신체적이라고 하면 포르노그래피누드사진에 대한 수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식(美食)의 쾌락 또한 섹스정도는 아니지만 환상적이다. ‘진미가 순수하게 신체적인 경험이라고 하면 과식도 그렇고 거식도 있을 리가 없다. ‘다이어트를 예로 들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뇌는 찰나의 쾌락’(날씬하게 보이는 것)을 위해 음식 섭취 거부를 명령하지만, 신체는 배고픔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체적 쾌락’(예컨대 성형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모두가 특정한 신체적 경험에 과잉의 의미부여를 하는 뇌의 활동의 효과라고 보는 것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체적쾌락이란 역으로 마음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라든지 시선이라든지 손가락 끝에 담겨 있는 상냥함배려는 신체로 다이렉트로 들어온다. 거기에는 나의 개체로서의 생존과 안전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확실한 형태를 띠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냥함배려영양분산소와 똑같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뇌는 그런 것 필요치 않는다.

뇌는 자신밖에 흥미가 없다. 뇌가 타자를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지배(기업)하고, 복종(관계중독)시키고, 향유(성형중독)하고 소비(재물중독/쇼핑중독)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뇌의 이성에 의해 신체의 야성 혹은 수성(獣性)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어디서나 상투어로 등장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적으로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뇌의 폭주를 신체적 규범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 아닐까?

착각해서는 안 되어서 급히 첨언하자면 나는 뇌의 폭주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나의 뇌는 지금 격하게 폭주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신체와 타자의 모습을 의미로서 파지(把持)할 수 있는 것은 뇌뿐이다.

뇌의 너무 과격한 활동은 인간존재에게 좀 그렇지 않은가?”하는 소급적인 자기반성혹은 자기언급을 할 수 있는 것은 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는 너무나도 과격하다. 그래서 다들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뇌는 기본적인 성향으로서 자기보존보다도 자기손상으로 향한다. 안정보다도 파괴를 선호한다.

그래서 뭔가뇌를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신체는 그것을 위한 억제적 기능이다.

신체가 뇌를 통제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일에 대해 고쳐 생각하면 꽤 풍경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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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협화음론자 비고츠키 그 첫번째 이야기 - 탈심리학을 선동한 미완의 사상가와의 대화
박동섭 지음 / 서현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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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등의 포털사이트에 나와 있는 '불협화음론자 비고츠키' 책 소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가 힘든 것 같아 이 책의 저자로서 책 소개를 다시 하고자 합니다. 이론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 심지어는 원전에 대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도 그런 오해와 왜곡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역사가 지닌 독특한 아이러니이다. 이 땅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비고츠키의 이론을 두고 벌어진 것보다 이 현상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왜곡 이후에 다시없을 것이다. 비고츠키의 심리학설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이론 즉 인간의 심리 혹은 마음(정신)은 ‘도구’로서의 언어라든지 기호를 매개로해서 기능하는 순간 그 전구조, 전기능이 ‘자연적(생물학적)’인 것에서 ‘문화적․역사적’인 것으로 비약적인 이행을 한다고 하는「문화적․역사적 발달이론」및 그것에 터한 심리연구에서의 ‘역사적 접근방식’의 의의가 이 땅에서 얼마만큼 제대로 평가받고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러한 ‘역사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이른바 ‘논리실증주의’ 사조가 이 땅의 심리학과 교육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인들의 인간과 심리를 보는 상(像)을 맺히게 하는 한 당연한 귀결이다. 논리실증주의(경험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결코 감추지 않았던 비고츠키. 그가 되려 그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눕고도 살아남기를 기대하고 그 생명력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본서에서는 교육심리학 텍스트와 교원임용고시에 단골로 등장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형 비고츠키의 모습을 완전히 내려놓고 더불어 그의 아이디어의 진수인 우리에게 있어 확실하고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이 ‘현실’이 있는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근대'라는 저물지 않는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 손에 의해서 디자인되고 재디자인된 산물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싶었다. 인간의 부단한 디자인에 의해 성립하는 세계의 모습. 여기서 말하는 ‘성립’이라고 하는 것은 도구를 만들거나 제도를 고안하는 것과 같은 외계의 구체적인 구성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느끼는 방식, 말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도 동시에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성립하는 것에 대한 기술은 바꿔 말하면 세계의 디자인의 가능성의 표명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 우리가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비고츠키에 대한 현실도 우리가 그 동안 디자인해왔으니 다시 그 우리가 재디자인 못하라는 법도 없다. 본서가 그 재디자인에 일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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